고전음악의 또 다른 메트로폴리스, 브뤼셀

글 입력 2014.06.02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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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의 또 다른 메트로폴리스, 브뤼셀

글 - Columnist 김승열


    2007년 3월 28일 수요일 저녁,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함께한 오페라 아리아의 밤이 펼쳐졌다. 구노와 마스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의 오페라 아리아로 채색된 이 날 밤의 서포트는 에마뉘엘 비욤 지휘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가 맡았다. 대다수의 파리지앵들은 이 날 네트렙코와 비야손의 명보컬을 감상하기 위해 샹젤리제 극장 객석에 입회했지만, 나는 그에 못지 않게 비욤이 이끄는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기량이 몹시 궁금했던 터였다. 이 날 처음으로 확인한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현주소는 더할 나위 없이 미끈하면서도 빌로드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풍려한 소노리티를 뽐내고 있었다. 특히 1931년 명지휘자 데지레 드포에 의해 창단된 벨기에 최고(最古) 악단,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는 프랑스 악단보다 더욱 프랑스적인 에스프리로 구노와 마스네의 마스터피스들을 농염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은 11월의 브뤼셀

    브뤼셀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1931년 창단된 악단은 1936년 지금의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로 개칭한 이후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었다. 1940/50년대 몬트리올 교향악단과 시카고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역임한 벨기에 출신의 명지휘자 데지레 드포(1885-1960) 이후, 앙드레 클뤼탕스, 미하엘 길렌, 앙드레 방데르노트 같은 명지휘자들이 악단의 수장으로 거쳐갔다. 2012/2013 시즌부터는 발터 벨러의 후임으로 안드레이 보레이코가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임중이다. 벨기에의 가장 유서깊은 악단이 뿜어대는 매혹적인 음률에 취해버린 나는 하루 빨리 브뤼셀을 방문하고 싶었다. 벨기에의 심장, 브뤼셀에서 이들의 연주를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후 브뤼셀을 방문할 막연한 구상만 했을 뿐, 좀처럼 브뤼셀을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브뤼셀행 기차에 오른 것은 이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2009년 11월 12일 목요일이 되어서였다. 파리 북역에서 고속열차 탈리스에 몸을 실은 나는 무작정 브뤼셀로 향했던 것이다. 파리에서 불과 1시간 20분이면 당도하는 가까운 거리건만, 브뤼셀을 찾는 데는 이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목적은 그 날 저녁 팔레 데 보자르 브뤼셀의 살 앙리 르 뵈프에서 예정된 미셸 타바쉬니크 지휘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무대를 목격하기 위함이었다. 1942년생의 스위스 지휘자 미셸 타바쉬니크는 2008년부터 브뤼셀 필의 수석지휘자로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67세의 타바쉬니크는 슈토크하우젠의 ‘풍크테’(Punkte)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라디오 플라망드 합창단과 옥토퓌스 실내합창단, 브뤼셀 엘리자베트여왕 음악예배당 솔리스트라는 세 개의 연합합창단이 가세했다. 2200석의 대연주회장인 팔레 데 보자르 안의 살 앙리 르 뵈프에서 열린 이 날의 연주회에서 타바쉬니크와 브뤼셀 필은 지글지글대는 스트링의 치밀한 윤기와 화끈하게 연소하는 금관, 유창한 목관, 신열에 들뜬 타악기가 일심동체로 화해 여지껏 내가 들은 최고의 ‘합창’ 교향곡을 빚어내고 있었다. 앞선 슈토크하우젠의 ‘풍크테’에서 한껏 그을린 가운데 예리한 치밀함으로 악상을 물들여간 점도 감탄스러웠다.

    1935년 그루트 교향악단이라는 간판으로 출발한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98년 VRT 라디오 오케스트라로 간판을 갈게 된다. 2008년부터는 브뤼셀 필하모닉-플랜더스 오케스트라로 명칭을 최종확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대 수석지휘자로는 KBS 교향악단과도 유대가 깊은 알렉산더 라바리(1988-1996)와 요엘 레비(2001-2008)를 거쳐 지금의 미셸 타바쉬니크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날 브뤼셀 현지에서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를 감상하면서 중세 시절 플랑드르 지역에 속하는 악단들만이 머금고 있는 고유한 소노리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전역, 네덜란드 남부를 아우르는 옛 지명인 플랑드르의 영토에 속해 있는 도시의 악단들은 게르만이나 스칸디나비아의 악단들과는 상이한, 치밀한 그을림의 때깔을 하나같이 머금고 있는 듯 느껴졌다. 대표적인 예가 암스테르담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소노리티인데, 이 날 내가 브뤼셀에서 접한 브뤼셀 필의 음향 또한 암스테르담의 악단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스트링파트부터가 무언가 부글부글대고 지글지글대는 정밀한 마력을 뿜어대는 가운데, 목관과 금관의 집약된 사운드가 가세하고 팀파니로 대표되는 타악기의 옹골찬 타건이 일관되는 것은 이들 플랑드르 지역 악단들만의 특색을 설명해주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어떻든 나는 처음 찾은 스산한 대기의 11월 브뤼셀에서 감동적인 무대를 구경하고 이튿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를 처음 듣고 브뤼셀에서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또한 들었으니 나는 벨기에의 유력악단 둘을 모두 들은 셈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브뤼셀이 품고 있는 대표적인 클래식음악전당 두 곳을 소개할 차례다.



-브뤼셀 부동의 음악명소, 팔레 데 보자르 브뤼셀

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외관1.jpg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외관 - ⓒ Yves Gervais / BOZAR

    우선, 내가 미셸 타바쉬니크 지휘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들은 팔레 데 보자르 브뤼셀부터 언급해야겠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벨기에의 유명건축가 빅토르 오르타(1861-1947)에 의해 건립된 팔레 데 보자르는 당대에 유행하던 아르 데코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음악, 조형예술, 연극, 무용, 문학, 영화, 건축을 아우르는 멀티아트센터, 팔레 데 보자르 브뤼셀은 오르타 홀과 전시실, 그리고 대공연장인 2200석의 살 앙리 르 뵈프, 476석의 실내악 연주회장, 210석의 스튜디오, 가변형 다목적홀인 살 테라르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살 앙리 르 뵈프는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와 브뤼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 및 해외 유명악단과 유명음악인들의 브뤼셀 방문무대로 기능하고 있다. 2003년부터는 팔레 데 보자르 브뤼셀이라는 긴 이름을 간결하게 각인시키기 위해 ‘보자르’(BOZAR)이라는 간소한 명칭을 채택해서 대내외에 공표하고 있다. 2002년부터 소시에테 필하모니크의 수장을 지낸 폴 뒤자르댕이 보자르의 총감독으로 재임중이며, 벨기에의 유력정치가 에티엔 다비뇽이 행정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살 앙리 르 뵈프5.jpg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살 앙리 르 뵈프 - ⓒ Jerome Latteur

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살 앙리 르 뵈프2.jpg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 살 앙리 르 뵈프 - ⓒ Jerome Latteur

    1937년 시작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도 바로 이 보자르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다. 매년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작곡 한 부문만을 번갈아 시상하는 이 저명한 콩쿠르가 배출한 1937년 첫 해의 그랑프리 수상자는 바이올린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였고, 이듬해 피아노 경연에서는 에밀 길렐스가 그랑프리를 석권했다. 1951년의 레오니드 코간, 1952년의 레온 플라이셔, 1956년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1964년의 예프게니 모길레프스키, 1989년의 바딤 레핀, 2009년의 작곡부문 조은화에 이르기까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배출한 인물들은 숱하게 많다. 이 같은 예술 전분야에 걸친 다채로운 기획 덕분에 보자르를 찾는 관람객수는 2007년 한해에만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인상적인 무대는 이 날 찾은 살 앙리 르 뵈프였다. 4층까지 촘촘히 올라가 있는 2200석의 객석과, 무대를 타원형으로 휘두른 상아빛깔의 내부는 방만하지 않고 아늑한 공간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대정면에 웅장하게 박혀있는 파이프오르간의 위용은 벨기에 음악의 심장이 이 곳이노라고 웅변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음향 또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명불허전의 빼어난 퀄리티를 과시했다. 이 날의 슈토크하우젠과 베토벤의 웅장한 사운드를 살 앙리 르 뵈프는 쩌렁쩌렁 울리는 직설적 어쿠스틱으로 조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할 오페라하우스,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jpg 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외관3.jpg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외관 - (c) J. Jacobs / La Monnaie

    이튿날, 브뤼셀을 떠나기 전 나는 그 유명한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을 방문했다. 1981년부터 1991년까지 벨기에의 유명 극장행정가 제라르 모르티에가 총감독을 지내면서 이 오페라극장의 위상은 수직상승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르티에는 당시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랑스 지휘자 실뱅 캉브렐링을 음악감독으로 위촉하는 위험수를 두었지만 숱한 명연을 일구어내는 등, 모르티에와 캉브렐링은 오페라사의 명콤비로 길이 남아 있다. 이후 2004년, 모르티에가 파리 국립 오페라의 총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한 번 모르티에는 캉브렐링을 중용했다. 그러나 모르티에와 캉브렐링의 파리에서의 두 번째 합작은 브뤼셀 시절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런 모르티에가 지난 3월 8일 췌장암 투병 끝에 71세로 타계했다는 부음을 들었다. 나로서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의 스튜디오에서 2006년 연초 ‘결혼과 해방’이라는 주제로 모르티에가 들려준 2시간 동안의 강연이 깊은 감명으로 남아있기에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jpg 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외관1.jpg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외관 - (c) J. Jacobs / La Monnaie

    1991년 모르티에가 10년의 임기를 마치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총감독으로 전근하자 베르나르 푸크룰이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의 바통을 이어받게 된다. 15년간 총감독으로 재임하면서 푸크룰은 당시 30대 초반의 안토니오 파파노와 오노 가즈시를 음악감독으로 연달아 초빙하며 극장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2007/2008 한 시즌 동안 영국지휘자 마크 위글스워스가 음악감독으로 잠깐 재임한 이후, 2012/2013 시즌부터는 프랑스의 젊은 지휘자 뤼도비크 모를로가 1700석 규모의 이 유서깊은 오페라극장을 이끌고 있다. 현재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은 모를로의 음악감독 체제하에서 르네 야콥스가 이끄는 콘체르토 보칼레를 게스트 상주단체로 기용하며 극장의 위상을 제고하고 있다. 벨기에의 다른 오페라극장들인 안트베르펜 소재의 블람제 오페라극장이나 리에주에 있는 왈로니 왕립 오페라극장과는 달리, 중앙정부의 재정지원을 풍족히 받고 있는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의 영광은 유로존 위기와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탄탄대로일 것으로 예측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오페라극장은 벨기에 국가유산이라 불러도 무방할 오랜 전통과 관록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1년 마스네의 오페라 ‘에로디아드’와 1886년 샤브리에의 ‘구웬돌린’, 1897년 댕디의 ‘페르발, 1927년 오네게르의 ‘안티고네’ 같은 숨은 걸작오페라들이 이 곳에서 초연된 사실만을 보더라도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만의 독보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크기변환_123jpg 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내부천장과 객석.jpg
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내부천장과 객석 - (c) J. Jacobs / La Monnaie

    더구나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은 1700년 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 공국의 재정자문인 지오-파올로 봄바르다의 지시로 최초 건립된 이래, 다른 유럽 유수의 오페라극장들처럼 격동의 세월을 동고동락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게 번갈아 식민통치를 당한 고난의 세월을 겪은 것도 모자라, 1855년 화재로 전소된 라 모네는 이후 벨기에의 명건축가 조세프 포엘라에르가 새로이 건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3년에는 국립오페라로 위상이 격상되었고, 1985년에는 대대적인 개,보수공사를 단행했다.

jpg 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내부천장.jpg브뤼셀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 내부천장 - (c) J. Jacobs / La Monnaie

    3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브뤼셀처럼 크지 않지만 내실있는 프로그래밍으로 유럽 오페라강자의 위상을 뽐내고 있다. 오페라극장의 사이비경영이 아닌, 정통경영이 무엇인지 궁금한 당신이라면 내일이라도 당장 벨기에 브뤼셀로 떠날 일이다. 그 곳의 라 모네 왕립 오페라극장은 대한민국의 허울뿐인 무개념 오페라극장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할 오페라극장의 정석들로 점철되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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