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1] 첫,

글 - 최 정 란
글 입력 2015.12.1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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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 1
 
첫,
 
글 - 최 정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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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기다리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리운 사람. 평생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 당신. 내 몫이 아닌 사람. 그래도 공항이나 터미널, 역 같은 곳,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혹시 어딘가로 떠나는 많은 사람 가운데 당신이 있을까 하여.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로 크게 내젓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고, 설령 당신을 만나게 된다 하여도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묵은 습관처럼 어디에도 함께 가지 못할 당신을 짐작해봅니다. 혹시 저 사람 일까. 혹시 저 사람 아닐까. 스치듯 공간과 시간을 잠시 공유하며 당신과 나는 보드라운 숨결을 나누었을까요.
 
만약 우연히 당신이 이 곳에 있다면, 당신은 멀리 떠나는 중일까요. 아니면 먼 곳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일까요. 더운 나라로 가는 것일까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일까요. 조심스럽게 궁금증을 누릅니다. 궁금증도 호기심도 내 몫이 아닐까요. 그리움과 기다림만이 내 몫일까요.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있다면, 그 앞에서 최소한 내가 몸짓이 과장된 허깨비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함부로 말을 던지고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거친 괴물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늦은 것을 만회하려고 서두르느라 무리수를 두는 성급한 바보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어쩌면 이번 생에 당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이마를 스치는 가벼운 미열로 다녀갔을지도 모릅니다. 오후가 되면 안절부절 못하는 조악한 조바심으로 다녀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소심한 불안으로 다녀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니. 당신은 잎이 물들기 직전에 가지가 잘려나간 은행나무의 피투성이 한숨으로 다녀갔을지도 모릅니다.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내 집 문 앞에 꽃피운 애기동백의 보드라운 꽃잎으로 떨고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꽃 피었다 지는 것으로 한 생의 의미를 모두 살다간 제비꽃의 차가운 보랏빛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은 가을바람과 함께 돌기를 멈추고 동안거에 들어간 선풍기의 플라스틱 날개로 여름 한 철 다녀갔을까요. 덥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돌고 돌던 제 자리 걸음의 당신. 뜨겁게 달아오르며 이대로는 견딜 수 없다는 나를 식히느라,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떠나겠다는 나를 눌러 앉히느라,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던 당신이었을까요.
 
함께 하늘을 날 수 없고 함께 땅을 걷을 수 없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당신. 함께 하늘을 날거나 함께 땅을 걷지 못해도, 세상 어디에나 있는 당신. 그리운 당신을 두고 떠납니다. 아니 그리운 당신을 향해 떠납니다. 조금 더 먼저 와서 마중하고 조금 더 늦게까지 배웅하면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첫 편지라 쓰고, 첫, 이라는 아픈 말을 발음해봅니다. 아무리 일러도 너무 늦은 첫, 아무리 늦어도 너무 이른 첫, 을 당신에게 남깁니다. 아름답고 서러운 불멸의 당신. (시인)




최정란 (시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과에서 시를 전공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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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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