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2] 스톱와치

글 입력 2015.12.2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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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 2

스톱와치

글 - 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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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서 멈춤시계를 발견했습니다. 재미삼아 버튼을 눌러봅니다. 언제였을까요? 돌아보면 기록을 갱신해야할 어떤 일이 있었던가요? 더 빠르게. 초까지 재면서 아주 짧은 시간까지 집중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디지털 화면에 시간의 흐름이 보입니다. 다섯 단위로 흘러가는 시, 분, 초 단위가 있습니다. 초 단위의 시간이 눈앞에서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보다 더 급속하게 흘러가는 백분의 일 초 단위도 있습니다. 99까지의 숫자는 미처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다음, 다음, 그 다음 숫자로 지나가버립니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권태의 시간과 고통의 시간은 체감되는 시간의 길이가 깁니다. 지루한 시간과 아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흐르면 많은 것들이 빠르게 잊혀지겠지요. 쉽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기억일수록 기꺼이 더불어 더 오래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고통의 시간이야말로 더 천천히 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오른쪽 버튼을 다시 한 번 누르면, 시간의 흐름이 멈춥니다. 무엇을 시작해서 무엇을 끝내기까지의 시간이 나타납니다. 이 한 문장을 쓰는데 삼십육 초가 걸렸습니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때가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요. 아주 가끔 오면서. 어떨 때는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슬쩍 다녀 가버리기 조차 합니다. 다 흘려보낸 후에야 그때가 행복했다고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이 멈춤시계로 최대한 잴 수 있는 시간은 9시간 59분 59초 99입니다. 살아온 많은 시간 속에서 정말 귀한 일에 쓴 좋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짧게라도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웠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그 도막들을 이어 붙인다면 열 시간을 넘을 수 있을까요? 헛된 걱정과 미움과 슬픔과 질투와 불안으로 보낸 시간은 얼마나 또 길고 길까요? 스톱와치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보여주면서, 가치 있는 일에 쓴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를 보여줍니다. 

왼쪽 버튼을 누릅니다. 지금까지 흘러간 시간이 지워집니다. 다섯 자리의 큰 영과 두 자리의 작은 영이 나타납니다. 시간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사건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있었던 사건들은 없었던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의 불가역성은 타임머신을 상상하게 합니다.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상상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일도, 그 고통도 모두 시간의 일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 시간의 자식들입니다. 시간이 있어 탄생이 있으니, 열 달을 보낸 엄마뱃속 역시 결국 시간의 자궁이었던 셈입니다.

영영영영영 영영.  일곱 개의 영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원점이지만 원점은 아닌 시간. 무언가 새로 시작해도 좋은 시간. 더 빨리 달려가라는 것은 아니고, 더 많이 무엇을 하라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무언가 시작해도 좋을 시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붙잡은 듯한 착각조차 불허하고, 어떤 힘센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는 시간. 흘러가는 줄 모르는 사이에 저만치 흘러가 있는 시간. 시작한 일은 끝나게 되어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언제 우리 삶의 스톱와치의 멈춤 버튼을 누르게 될지 모릅니다.

일곱 개의 영 아래에서 짧은 디지털 바 세 개가 깜빡거리며 속삭입니다. 시작해. 무슨 일이든. 그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그 시간이 고통이든 기쁨이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흘러가 버리는 거니까. 저축할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이니까. Stop watch! 지켜보기를 멈춰. 시작해. 지금. 사랑이든 여행이든 일이든. (the E.)





최정란 (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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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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