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3] 토마토

글 - 최 정 란
글 입력 2016.01.04 23:1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인의 저녁편지 3

토마토

글 - 최 정 란


noname01.jpg
 

토마토 모종 한 그루에게 마음을 주며, 견딘 한 철이 있었어요. 토분에 담긴 어린 토마토 모종은 연약해서 하루만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시들 잎이 시들었어요. 내가 없으면 이 토마토에 누가 물을 주지? 이틀만 돌아보지 않아도 뿌리가 말라 버릴거야. 그 걱정에 하룻밤 자고 돌아올 일정을 앞당겨 무리해서라도 굳이 당일치기로 바꾸곤 했어요. 

멀리 갔다가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어요. 몇 개의 얇고 작은 연둣빛 잎을 매단 가느다란 줄기의 어린 식물이 목이 빠져라 물을 기다릴 것을 생각하면, 젖을 찾는 아기의 채송화 꽃잎 같은 작은 입이 떠올랐어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젖이 핑 돌았어요. 

나를 기다리는 속수무책의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내가 도움이 되니까요. 그보다 어두운 집안으로 혼자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까요. 토마토가 열매 맺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저 살아있고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무엇보다 토마토는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어요. 

한 번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리스트가 길어졌어요. 엄마가 떠나고 아버지가 떠났어요. 사람들이 죽어서 떠나는 것이 두려웠어요. 세상에 살아남은 내가 잉여인간 아닌가 싶었어요. 살아있으면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했어요.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어요. 나를 기다리는 존재가, 내가 기다리는 존재가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어요. 

토마토는 햇빛이 드는 쪽으로 수시로 옮겨주어야 했어요. 꽃이 피고부터는 작은 바람에도 줄기가 휘청거려, 나무젓가락 두 개를 묶어 작은 지지대를 세워주었어요. 제가 서둘러 피운 꽃잎 한 장 무게도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면서도토마토는 날마다 조금씩 자랐어요.  줄기에 진딧물이 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사소한 이유로 나를  번거롭게 만들면서도, 토마토는 한 팔 길이의 대나무로 지지대를 교체해주어야 할 만큼 자랐어요

발을 가진 것들은 살아서도 떠났어요.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한 날들이었어요. 사람이 무섭고, 사람이 그리웠어요. 사람 가까이 다가가면 거친 말의 가시에 찔리고,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얼어 죽을 것처럼 추웠어요.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았고, 설렘과 두근거림 혹은 희망 대신 배신감과 실망 그리고 절망이 내 몫이었어요. 

토마토는 다년생이었어요. 그러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나를 위해 별 같은 노란 꽃 몇 송이 반짝 피워주고, 작은 열매 다섯 개 간신히 매달고는 한 철 만에 나를 떠났지요.  그래도 그때 멀리 아주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서둘러 가고 싶었던 나는, 그 어리고 짧은 목숨 덕분에,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고 지금 살아있어요. 

돌아보면 아득해요. 얼마나 믿을 데가 없었으면, 얼마나 기댈 데가 없었으면, 엄살 한 번 떨지 못하고, 투정 한 번 못하고, 토마토 모종 하나에 마음을 기대다니요. 그 가느다란 토마토가 나를 지탱해준 지지대였다니. 살아만 있으면 더 이상 아프지도 춥지도 않은 날이 언제인가 올 것이라고 믿었을까요? 

그때는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나를 아프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더 자주 떠나고 내가 더 많이 사람들을 아프게 한 것 아닌가 싶어요. 내 발 밑의 작은 아픔에 골몰하느라 다른 사람의 큰 아픔을 못 보았으니. 토마토 모종에 받쳐준 나무젓가락 지지대 같은 역할 한 번 못 해주면서 원망만 했으니. 

당신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나요? 무엇에 기대어 당신은 불어오는 어둠의 검은 바람에 맞섰나요?  (the End 3)




최정란 (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ART insight

Art, Culture, Education - NEWS


[심우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