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8] 구구소한도

글 - 최정란
글 입력 2016.02.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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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8

구구소한도

글 - 최 정 란


홍매.jpg
 (20160219 통도사 홍매)


창호지가 팽팽해진다 바람의 등에 탄 먼 벌판이 고삐를 당기는지 살얼음이 동치미 국물을 가두는 동지 긴긴 밤, 어둠이 열두 폭 향기를 칭칭 동여매는 밤, 멀리서 봄이 출발했다는 전언이 온다 가파른 눈길을 헤치고 아홉 번 미끄러지고 아홉 번 엎어지는 얼음길 아홉 구비를 돌아야 한다 얼음 녹인 물감을 풀어 칠해나가는 붓끝에서 하루 한 송이씩 늘어나는 꽃들, 종이 위에 여든 한 송이 매화가 채워지면, 강의 심장을 동여맨 얼음사슬이 끊어지리라 수만의 꽃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시투성이 매화나무가 마당 가운데 우뚝 서리라 이윽고 봄이 도착하리라 열두 폭 병풍 펴고 절하며 맞으라  우울이 활짝 창궐하리라 < 구구소한도/ 최정란 >


구구소한도는 옛사람들이 만든 겨울일력입니다. 구구 팔십일, 매화 여든 한 송이를 종이에 그린 일력이지요. 동지 다음 날 부터 시작해서 날마다 한 송이씩 붉게 꽃을 칠해나갑니다. 경칩과 춘분의 중간인 삼월 십일 정도가 되면 구구소한도의 마지막 꽃을 모두 칠하게 될 것입니다.

노루꼬리만큼씩 낮이 길어진단다.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이 오면, 팥죽을 부뚜막 뒤에 뿌리며 엄마가 말하지요. 밤이 가장 긴 날, 동지 무렵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깊습니다.  짧아지기만 하던 낮이 다음날부터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겨울햇살의 혀가 날마다 조금씩 더 길게 남쪽 거실을 핥고 갑니다. 동지부터는 마음속에 봄이 시작되었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도 봄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봄은 아주 먼 곳에서 출발 한 것이니까요. 동지까지의 추위는 맛뵈기에 불과합니다. 본격적으로 추운 날들은 동지부터입니다. 대한 소한 추위가 닥쳐옵니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가다 얼어죽는다. 이런 옛말이 있을 만큼 할 만큼 소한 무렵이 가장 춥습니다. 겨울의 한가운데 소한 추위를 견디는 마음이 일력의 이름에 들어가 있지요.

맑은 날은 매화의 아래쪽 꽃잎, 흐린 날은 위쪽 꽃잎, 바람 부는 날은 왼쪽 꽃잎, 비 오는 날은 오른쪽 꽃잎, 눈 오는 날은 꽃의 가운데 꽃술을 붉게 칠합니다. 색을 칠하는 방향에 따라 날씨를 표시하기도 하니, 일기도 역할도 겸하는 셈이지요. 참 낭만적이지요. 추위를 견디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날마다 꽃잎 한 송이씩 칠해나가는 방법으로 표현하다니요. 

이번 겨울 컬러링북을 한 권 샀습니다. 윤곽선이 그려진 그림에 색을 채워 넣는 책입니다. 북반구의 겨울은 자연에서 색을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므로, 색을 채워넣는 사소한 작업이 무채색의 자연이 주는 쓸쓸함을 조금씩 지워줍니다. 구구소한도를 칠하던 옛사람의 붓만큼은 아니겠지만, 색연필을 들고 윤곽선 안에 색을 채워넣으면 조금씩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얼마나 더 색을 더하면 냉정한 세계를 건너오는 동안 얼어붙은 마음이 녹을까요. 단지 견디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더 냉정해야 했던 시간에도 봄이 올까요.

당신은 당신의 겨울을 어떻게 견디셨는지요. 봄을 부르는 당신만의 주문이 있으신가요. 어쩌면 당신은 겨울을 어떻게 견디는 대신 어떻게 즐기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춘 지나고 우수 지납니다. 구구소한도의 꽃송이들을 미처 다 칠하기도 전인데, 벌써 매화가 피었다는 전언이 옵니다. 남은 꽃송이들을 마저 다 칠하면, 북쪽도시에도 봄이 오겠지요. 저는 오늘 마음 속에서 구구소한도를 떼내고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엽니다. 당신 거기 활짝 꽃 피어 우뚝 서 계신가요.  (the E)




최정란(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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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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