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10] 숨,

쉿! 산수유 꽃눈이 숨을 참고 있어요.
글 입력 2016.03.0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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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10

숨,

글 - 최정란
사진 - 김정옥


숨, 김정옥 사진 (2016.03.04).jpg


쉿! 산수유 꽃눈이 숨을 참고 있어요. 아,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가빠요. 꽃눈 위에 쌓인 봄눈의 무게까지 다 견디고 나면, 마침내 산수유는 겨우내 참았던 숨을 활짝 토하겠지요. 나날이 살 올라 볼록해지는 꽃눈들 앞 다투어 터지고, 잇달아 수 천 수 만의 잎눈들 터지면, 연두빛 숨길이 열린 숲에는 생명의 노래가 출렁대겠지요.

숨쉬기를 배워요. 매주 한 번씩. 숨쉬기를 배운다고요? 숨쉬기는 선천적으로 얻는 것 아닌가요? 음.파.음.파. 수영할 때야 물속에서 숨쉬기를 배우지만, 지상에서 숨은 그냥 쉬면 되는 것 아닌가요?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태어나면 호흡은 당연히 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아니 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조차 안 해봤다는 게 옳을 거예요.

합창을 하면서 지상에서의 호흡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배우면 숨쉬기가 깊어지고 길어져요. 숨을 가슴보다 더 아래 배까지 깊게 밀어 넣어요. 쓰, 먼저 충분히 들이마신 들숨을 가능한 길게 날숨으로 내쉬어요. 쓰 쓰 쓰 쓰 쓰 쓰 쓰, 다음에는 충분히 들이마신 들숨을 가능한 여러 번의 날숨으로 짧게 나누어 내쉬어요.

긴 박자의 음을 충분히 길게 내지 못하는 나는 노래 중간중간 살짝살짝 도둑숨을 쉬지요. 아주 긴 음에서는 입만 벌리기도 해요. 호흡기의 기능이 선천적으로 약해서 폐활량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더 강하게 만들 생각은 안했지요.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다만 약하니까 조심할 뿐이었지요.

노래는 매우 적극적인 숨쉬기가 되지요. 매주 규칙적으로 노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놀랍게도 점차 호흡이 길어졌어요. 합창을 하고 온 날은 활력이 느껴져요.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고 지치던 몸이 한참을 걸어도 상쾌하고 가뿐해요. 노래의 리듬이 개선되면서 몸의 리듬도 활기를 되찾을 줄 몰랐어요. 노래하는 동안 깊은 숨을 쉬고, 모세혈관 끝까지 산소가 잘 전달된 덕분일까요.

약한 숨은 얕은 자리에서 작용하고, 강한 숨은 깊은 자리에서 작용해요. 숨 쉬는 자리가 얕으니 숨의 길이가 짧고 숨의 강도가 약할 수밖에요. 얕은 숨을 쉬면 음은 쉽사리 끊어지고 충분히 길게 이어지지 못해요. 결과적으로 리듬은 깨어지고, 박자를 못 맞추는 음치가 되기 십상이랍니다.

얕은 숨은 자주 쉬어야 하므로 숨이 가빠요. 성급하고 빠르지요. 깊은 숨은 호흡 횟수가 줄어들므로 숨이 가쁘지 않아요. 느긋하고 느리지요. 숨쉬기는 단순히 노래를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의 성격이나 삶의 속도에까지 영향을 미쳐요.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하지요. 알고 보니 나는 노래를 잘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숨쉬기가 서툰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늦게 알게 되다니요. 그동안 나의 숨쉬기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제껏 내 숨은 기껏해야 횡경막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정도였어요. 입안에서 말을 우물거리다 삼키느라 숨은 자주 울먹였고, 목 언저리에서 맴돌며 숨은 자주 헐떡였지요. 사소한 감정에 연연하느라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못한 숨은 얕은 곳을 간신히 들고 났지요.

성급하게 서두르다 놓친 것들로 모자이크된 내 인생퍼즐의 모든 오류는 나쁜 숨쉬기 방법에서 시작했을까요. 지금까지 배운 것이 모두 헛된 욕망을 향한 질주였을까요. 다시 숨쉬기를 연습해요. 가슴을 지나 배꼽을 지나 자궁까지 숨을 밀어넣어요. 생명의 첫 자리까지 깊이 더 깊이.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어요.

숨의 속도는 삶의 속도 같아요. 쉼의 속도이고 기다림의 속도 같기도 해요. 성급하게 살아온 생의 순간들을 반성하게 되요. 서둘렀고 진득하게 견디거나 기다리지 못했어요.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조금씩 연습하다보면, 언젠가 높고 낮고 길고 짧게 자유자재로 숨 쉬게 되는 날도 올까요.

가장 당연히 얻는 것이라 생각한 것도 노력해서 연습해야 할 때가 있어요. 세상은 넓고 배워야 할 것은 많군요. 진짜 중요한 것들을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배워보려 해요. 태어나면서 당연히 얻은 줄 알고 있던 호흡조차 당연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한편 깊이 절망하지만 한편 기뻐요. 이제라도 알게 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의심하고 시작하라.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단호해요. 텅 빈 거죽뿐인 나를 갈아엎는 봄입니다. (the E)




최정란(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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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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