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속에서 떠난 베르디

글 입력 2014.01.0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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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한 밀라노. 밀라노 시가지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고딕식 대성당 두오모(Duomo)가 마치 롬바르디아 평원을 뚫고 나와 원대한 힘으로 하늘을 향하여 치솟아 오르는 듯하다. 두오모 앞 넓은 광장에는 이탈리아 통일의 구심점이 된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이 거대한 성당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이탈리아는 거의 1400년 동안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아 왔는데, 19세기 전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방은 오스트리아, 리구리아 지방은 프랑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가 갈기갈기 찢긴 이탈리아인들은 통일을 염원했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870년에 완전히 통일을 이룩했다. 이 통일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가가 있다면 바로 베르디이다. 그는 오페라 <나부코>를 통하여 이탈리아 시민들에서 통일의 중요성을 부추겼던 것이다.

1842년 스칼라 극장에서 이 오페라가 초연 될 때의 일이다.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간 히브리인들이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 <바 펜시에로(Va' pensiero)>가 흘러나오자 감격한 관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곡은 외세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으며 또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알려져 모든 사람들 사이에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르디’라는 이름은 통일운동의 상징이자 민중의 구호가 되어 거리에는 W V.E.R.D.I! (비바 베르디!)라는 글씨가 곳곳에 나붙었다. 이것은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의 왕 만세!)의 약자로, 이탈리아 통일의 염원을 담은 문구였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나부코> 공연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면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고 곡이 끝나면 으레 비스(앙코르)를 요청한다. 그런데 베르디의 이 성공작은 처절한 인생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탄생했다. 



▲ 대성당 두오모와 이탈리아 왕국 초대왕 빗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상


사실 이 위대한 음악가는 우리식 기준으로 따진다면 음대 출신이 아니라 거의 스스로의 힘으로 음악가가 된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 승리의 드라마’였다. 18세 때이던 1832년, 그는 밀라노 음악원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는데 그 이유는 나이가 입학 제한 연령보다 많고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지방이 아닌 다른 지방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으며, 음악적으로는 피아노 연주 테크닉이 잘못되어 있고 작곡 실력도 허술하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입학을 거부한 밀라노 음악원이 나중에 ‘베르디 음악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은 기가 막히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베르디 음악원’ 입학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베르디는 스칼라 극장에서 한때 활동한 적이 있는 동향 출신의 작곡가에게 3년 동안 배우면서 작곡뿐만 아니라 드라마에 대한 감각을 홀로 터득해 나갔다. 그런데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인간적인 고통이 닥쳐왔다.
   

파르마 근교 시골도시 붓세토에서 신혼살림을 살던 중 1838년에는 딸이 죽었고, 밀라노로 이주한 1839년에는 아들마저 죽었으며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1840년에는 부인 마르게리타까지도 뇌막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도 불과 2년 사이에 가족 모두를 잃어버린 슬픔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스칼라 극장의 흥행사 메렐리가 청탁하여 무대에 올린 작품들도 모조리 흥행에 실패하자 베르디는 삶의 의욕을 잃고 음악계를 완전히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은 당시 그를 완전히 버렸을지는 모르나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당시 그를 붙잡은 사람이 있었다. 실패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끝까지 꿰뚫어 보고 있던 사람은 바로 흥행사 메렐리였다. 만약 메렐리가 베르디에게 새로운 오페라 <나부코>의 대본을 건네주고 작곡을 의뢰하지 않았더라면 이탈리아 오페라의 역사는 완전히 달리 쓰였을 것이다.




▲ 베르디의 묘소




거의 90세까지 살았던 베르디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주었는데, 오페라『팔스타프』를 작곡할 때는 이미 80대의 노인이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삶을 지켜준 신에게 바치는 종교곡을 쓰고는, 1901년 1월 21일 오후, 그가 기거하던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 때에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9백 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두오모 광장과 밀라노의 거리에 울려 퍼졌으며, 수천 명의 시민들도 이 노래를 같이 따라 불렀다. 그것은 인간적인 역경을 이겨낸 후 이탈리아 통일의 혼을 불태우게 하고 또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시였던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늘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가끔 위대한 선물을 내려 주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단 한 사람에게만 엄청나게 내릴 때도 있지만, 인간적인 고통도 함께 내려서 이를 통하여 하늘의 선물을 더욱더 값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베르디의 경우가 그러했다.
 


글. 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공인 건축가, BAUM architects 파트너,
저서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이탈리아 도시기행」,「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외 다수
KBS TV특강, EBS 세계테마기행 출연






출처 - 음악저널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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