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이먼 래틀의 도시, 버밍엄

글 입력 2016.11.0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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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래틀의 도시, 버밍엄


글 -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지난 5월 19일 목요일 오전, 맨체스터 피카딜리역에서 남서쪽으로 몇시간을 내달린 기차는 버밍엄에 도착했다. 버밍엄 하면 인구 백십만명을 자랑하는 영국 제 2의 도시이자 공업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18세기말의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의 개량자로 유명한 제임스 와트와 가스등의 발명자 윌리엄 머독이 버밍엄을 터전 삼아 활동한 것 또한 이 도시의 자랑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버밍엄 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이다. 1920년에 창단되었지만 60년 간 무명의 악단으로 외면받다가 1980년 약관 25세의 나이에 수석지휘자에 취임한 사이먼 래틀(1955- ) 시대에 이르러 동악단은 비로소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나이에 본머스 심포니와 로열 리버풀 필의 어시스턴트 컨덕터를 지낸 래틀의 천재성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맡으면서 활개를 치게 된다. 말러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및 20세기 현대음악에서 전무후무한 스페셜리티를 과시한 래틀 휘하 버밍엄 시향은 런던의 빅5를 앞지르는 영국 최고 악단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다. 래틀 부임 직전 버밍엄 시향을 이끌었던 프랑스의 명지휘자 루이 프레모(1921- ) 시대에도 이 정도의 위상확립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래틀의 후임자들이었던 사카리 오라모(1965- )와 안드리스 넬손스(1978- ) 시대에도 버밍엄 시향은 래틀 시대를 그리워하기에 바빴다. 그만큼 1980년부터 1998년까지 래틀이 수석지휘자와 음악감독으로 버밍엄 시향에 봉직했던 18년 세월이야말로 무명악단이 초일류 악단으로 등극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음악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래틀은 2002년 가을 아바도를 잇는 베를린 필의 6대 수석지휘자로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버밍엄 시대의 래틀이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일까. 베를린 시대의 래틀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희석되어버린 느낌이다. 내년 가을 런던 심포니 역사상 최초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하는 래틀이 예전 버밍엄 시절의 강력한 존재감으로 회귀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 래틀의 버밍엄 시절 기념비, 버밍엄 심포니홀

1980년대까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본거지는 천석을 간신히 넘는 수준의 타운홀이었다. 1834년 그리스 신전 모양의 고대 로마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타운홀은 그러나 늘어나는 버밍엄시의 클래식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협소했고 시대착오적이었다. 급기야 래틀의 집요한 콘서트홀 건립요구를 수용한 버밍엄시는 타운홀 지근거리에 새로운 심포니홀의 건립을 공표했고, 2262석 규모의 버밍엄 심포니홀이 1991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입회하에 개관테이프를 끊게 된다. 빈 무지크페라인잘과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를 모범 삼아 3천만 파운드라는 거액을 들여 건립한 버밍엄 심포니홀의 어쿠스틱은 명불허전으로 이름 높다. 연간 270회 가량의 연주회를 유치하는 버밍엄 심포니홀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연주회 말고도, 해외 유수 악단들 및 세계 일류 클래식 음악가들의 버밍엄 방문무대와 재즈, 월드뮤직, 팝 같은 제 3의 장르들에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비틀즈와 퀸을 배태한 팝의 본고장답게 비클래식 장르에도 관대한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버밍엄 심포니홀 무대와 객석1 credit Mike Gutteridge.JPG

버밍엄 심포니홀 무대와 객석3 Credit Mike Gutteridge.JPG
버밍엄 심포니홀 무대와 객석
/ © Mike Gutteridge


나는 이 버밍엄 심포니홀에서 지난 5월 19일 저녁 프랑스 지휘자 뤼도비크 모를로(1973- )가 지휘하는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시벨리우스와 라벨 콘서트를 관람했다. 시벨리우스의 ‘템페스트’ 전주곡과 교향시 ‘대양의 여신’ 사이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과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영국의 명피아니스트 스티븐 오스본에 의해 연주된 기막힌 무대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메인 프로그램으로 영국의 현대작곡가 존 루터 애덤스(1953- )의 관현악곡 ‘대양되기’(Become Ocean)가 영국초연된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초딜럭스 무대이기도 했다. 이 난곡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해치우는 버밍엄 시향의 연주력에 감탄한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니었다. 5층 저 위 객석까지 가득 메운 버밍엄 시민들 모두가 이 날 버밍엄 시향의 걸출한 연주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2001년 무려 6천개의 쇠파이프를 동원해 뒤늦게 설치한 파이프오르간의 위용이 이들의 휘황한 연주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 주는 듯도 했다.

나는 이 날로부터 9년 전인 2007년 2월 파리 라디오 프랑스 내의 천석 규모 살 올리비에 메시앙에서 버밍엄 시향의 연주회를 목도한 적이 있다. 당시 라디오 프랑스의 현대음악축제인 ‘현존’(Presence)의 2007년 주빈작곡가로 선정된 영국의 토마스 아데(1971- )는 버밍엄 시향과 버밍엄 현대음악그룹을 대동하며 자신의 작품 다수와 아일랜드의 현대작곡가 제럴드 배리(1952- )의 곡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로부터 9년 만의 버밍엄 현지에서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과의 해후였기에 감회는 더욱 남달랐다. 특기할 것은 두 달 전인 지난 9월부로 리투아니아 태생의 젊은 여류지휘자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1986- )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새로운 음악감독으로 부임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잘츠부르크 주립극장의 음악감독도 맡고 있는 그녀는 동악단의 96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수장이라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10년째 일하고 있는 마린 알솝(1956- )과 작년까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을 10년 간 지낸 시모네 영(1961- ) 외에는 이렇다 할 여성지휘자를 찾아볼 수 있는 세계음악계의 사정을 감안하면,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의 버밍엄 입성은 적지 않은 기대를 품게 만든다. 과연 그녀가 래틀-오라모-넬손스로 이어지는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마에스트로 신화의 그림자를 얼마만큼 감당하고 걷어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내친 김에 그녀의 시대가 가기 전에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첫 내한공연 또한 성사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버밍엄이란 도시를 마주한 첫인상은 황량하고 스산한 풍경 일색이었다. 5월 중순의 한창 무르익은 봄날 공기였음에도 버밍엄은 왠지 칙칙했고 우울했다. 이런 버밍엄의 적막한 대기를 이완시켜줄 치유제가 음악인 것일까. 버밍엄에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이 없다면, 그리고 버밍엄 심포니홀이 없다면 그 곳은 더 이상 버밍엄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버밍엄을 떠나 런던으로 향하는 귀로에 오르면서 언제 다시 찾을 지 모를 이 도시에 먹먹한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버밍엄 심포니홀 외관1 credit mike gutteridge.jpg
버밍엄 심포니홀 외관
/ © Mike Gutteridge





김승열 (음악칼럼니스트)

-고전음악칼럼니스트.

월간 클래식음악잡지 <코다>,<안단테>,<프리뷰+>,<아이무지카>,<월간 음악세계> 및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계간지 <아트인천>,
무크지 <아르스비테> 등에 기고했다.

파리에 5년 남짓 유학하면서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를 수백편 관람한 고전음악 마니아다.

저서로는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투티)가 있다.
현재 공공기관과 음악관련기관, 백화점 등지에서 클래식/오페라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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