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달빛이 아닌 햇빛에서, 회색이 아닌 형형색색으로

글 입력 2017.03.2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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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은 늘 동경하는 가치였다. 두발규정이 다듬어 놓은 검정 단발머리, 놀랍도록 똑같은 치마길이, 무채색의 가방 색깔까지. 무색무취의 향연 속에서 답답한 척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지극한 평범함이 티가 나지 않아 안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잿빛 교정을 스멀스멀 비집고 나오는 친구들의 향기와 색깔이 부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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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은 다름을 강조했다. 나만의 특색, 나만의 무기를 가져야 하며 그것은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자연스러웠고, 약속이라도 한 듯 쏟아지는 조언들은 그런 무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다름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 속에서 나는 모든 다름이 인정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만을 뼛속 깊이 체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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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입이 달토록 말하는 다름은 순수한 의미의 다름이 아니다. 다름이라는 말 앞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어떤 수식어들이 숨어있다. 

사회적으로 대다수가 용인할 수 있는 다름
대학이 좋아하는 다름
회사가 좋아하는 다름

사회가, 대학이, 회사가 선호하는 다름의 기준에 맞게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똑같은 다름을 양산해내는 과정은 아이러니이며 정형화된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불량품 취급하는 행태는 폭압적이다. 조금은 특별하길 바랐던 내가 시간이 갈수록 평범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까지 했다는 것은 원하지 않는 다름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얼마나 가혹한가를 증명한다.
 더욱 심각한 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절대 바꿀 수 없는 본질에 있어서도 사회는 자기 멋대로 정해놓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성정체성과 성적지향, 인종이 대표적인 경우다. 회색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빨간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단순히 회색 옷을 입으면 그만이지만 그 자체가 빨갛거나 초록이거나 분홍인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색이 될 수 없다. 넘실거리는 회색 바다를 칠을 하고 떠다녀야 하는 외로움, 내가 나라는 이유로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선, 수군거림. 그 모든 것들을 영화 <문라이트>는 잔인하게도 샤이론이라는 한 남자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문라이트를 보지 않는가?’ 이는 문화비평 강의에서 읽었던 <문라이트>에 관한 한 평론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저자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라라랜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경쟁 구도를 이룰 정도로 <문라이트>가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를 주인공에게서 찾았다. 왜일까? 주인공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걸까?
 영화 <문라이트>는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보면 주인공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게 문제인가 싶겠지만 주인공 샤이론이흑인이고 게이이며 극빈층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의 요소를 모두 갖춘 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흥행 부진으로 이어졌다고 평론의 저자는 말했다.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샤이론이 샤이론이었기에 영화 <문라이트>는 극한의 외로움 자체였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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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포스터 속 남자의 얼굴에서 우리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왼쪽은 소년시절의 샤이론(리틀), 가운데는 청소년기의 샤이론(샤이론), 오른쪽은 어른이 된 샤이론(블랙)이다. 리틀 역은 알렉스 R.히버트, 샤이론 역은 에쉬튼 샌더스, 블랙 역은 트래반트 로즈가 맡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정도로 같은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외로움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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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이론은 세 사람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작은 꼬마 아이(리틀)였다가, 어느 정도 성장한 소년(샤이론)이었다가, 마지막엔 울룩불룩한 근육질의 마약상(블랙)으로. 하지만 세 부분으로 나뉜 샤이론의 인생은 저마다 다른 타이틀을 달고 있다. 다만 청소년기의 샤이론만이 샤이론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건 리틀이나 블랙일 때와는 달리 자신의 다름을 겨누는 타인의 시선에 저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기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샤이론은 블랙으로 살아간다. “난 원래 그렇게 살 운명이었어.”라고 샤이론이 이야기했듯이 샤이론은 남들과 다른 스스로를 사랑하는 대신 불명예스러운 다름이라고 사회가 낙인찍은 대로 어두운 ‘블랙’들의 모습을 입는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화려한 겉모습을 과시할수록 블랙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 느낄 수 있다. 서로 다른 세 명의 샤이론을 한 사람으로 묶어내고 있는 건 영화감독도 시나리오도 아닌 그들의 눈빛을 타고 흐르는 케케묵은, 생생한 외로움이라는 걸.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샤이론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가 그의 다름에 행한 폭압의 산물이라는 걸 말이다. 흑인이고 게이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느끼지 않았어도 될 외로움이었다. 그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결국엔 외로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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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이 사무친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러할까. 마음이 눈물로 가득하면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음에도 그렇게 보이는 걸까. 영화는 대체로 뿌옇게 표현되고 있다. 그건 단순히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연스럽게 흐려지는 효과를 뛰어넘어 눈에 물이 차올라본 사람이라면 알 법한 희뿌연 번짐이다. 그래서인지 샤이론도 나도 울고 있지 않은데 마음은 내내 먹먹했다. 영화의 바탕에 깔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선율은 샤이론의 눈물에 젖기라도 한 듯 무겁고 축축했다.


 어머니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샤이론에게 그에 비할만큼의 애정을 쏟았던 후안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한 할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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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을 쫓아 뛰어다니는구나.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언젠가 달빛 아래 선 샤이론의 모습은 어느 할머니의 말처럼 그저 푸르다. 회색빛 세상도 그렇다. 그렇기에 아무도 ’샤이론이라는 이유‘로 그를 질타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만큼은 더 이상 흑인이나 게이라는 샤이론의 색깔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한편 불안하다. 달빛은 언젠가 저물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달빛이 아닌 햇빛 속에서도 샤이론이 있는 그대로이길 바란다. 되도록, 아니 반드시 그가 회색이 되는 쪽이 아니라 세상이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쪽으로. 차가운 달빛이 아니라 따스한 햇빛이 샤이론들의 외로움을 닦아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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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 구글 이미지 발췌
* 네이버 영화 포토 발췌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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