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생각] 지하철에서,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시며'

글 입력 2017.03.3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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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학생인 나의 하루는 버스와 지하철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른 아침, 덜 깬 아침잠과 함께 버스에 발을 디디는 것으로 내 하루는 시작된다. 이른 아침의 버스는 대체로 조용하다. 출근하는 회사원들이나 학교 가는 대학생들이 주로 아침 버스에 오른다.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못 다 잔 아침잠을 자거나, 핸드폰을 꺼내 새로운 소식들을 확인한다. 간혹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다. 50분 정도가 지나면 버스는 서울에 도착한다. 그러면 버스라는 작은 공간에서 짧은 시간 함께했던 사람들이 가방을 들쳐 메고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지하철을 탄다. 수업을 마친 6시 경의 지하철은 몹시 붐빈다. 지하철 한 칸에 지친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지하철은 몹시 비좁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다. 그런 탓에 한 명에게 부여된 공간은 매우 자그마하고, 때론 발만 겨우 디디고 서있기도 한다. 발만 겨우 제자리를 찾는 6시 경의 지하철은 소란스럽다. 지하철 도어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빠져 나가고 밀려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있는 이들은 앓는 소리를 낸다. 그나마 제 자리를 지키던 발조차도 이럴 때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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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중에도 두런두런 말소리는 들려온다. 6시 경의 지하철에는 이야기가 많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염탐할 생각은 없지만,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서로의 체중을 조금씩 의지하며 버티고 서있다 보면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오늘 내 곁에 서 있던 회사 동료로 보이는 두 명의 중년 남녀는 각자의 자식들을 걱정했다. 서로 작은 위로를 건네고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남성은 불합리한 일을 겪었는데 돈도 없고 인맥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세상을 원망하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살아보니 세상이 그렇더라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한숨 소리마저 지하철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이내 묻히고 말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는 서로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 전 헤어진 연인과 새로 만난 연인,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며 열띤 논쟁을 벌였다. 한편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고 지하철이 비교적 한산해지면 그 틈을 타서 잡상인들이 지하철에 오르기도 한다. 그들은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 소리 내며 걸어 다니는 강아지 인형이나 방수 돗자리의 유용성 등에 대해 역설한다. 이렇듯 6시 경의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진다. 그리고 나는 문득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가 떠올랐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한 칸의 지하철, 그리고 발 딛고 서 있는 작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한 칸의 지하철 속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곳을 떠나면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이 닫히고 다시 달리는 지하철 안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있고 그들의 삶이 있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던 간이역의 그들처럼, 매일 지하철에 오르는 이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살아가는 것이 때론 고통스럽고, 방향성도 모호하다는 것을. 그러나 오늘 '6시 경 지하철'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이것을 또한 느꼈다. 그럼에도 그들이 꿋꿋이 견뎌낼 것이라는 것을.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시며 그런 시간을 잘 보낼 것이라는 것을. 다시 달리는 지하철처럼 꿈을 꾸며 달려갈 것이라는 것을.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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