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감각05.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어요

글 입력 2017.04.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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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광화문




감각05.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어요


  4월 16일. 광화문 광장. 세월호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을 따라 긴 줄을 섰고 차례를 기다리는 내내 나는 침묵을 지켰다. 신호등 불빛에 맞춰 오고가는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 속에서, 진실을 밝혀달라는 이들의 꺼지지 않는 외침 속에서, 하늘로 솟구치다 엎어지기를 반복하는 분수의 물빛 속에서, 맑은 봄날이 지나가고 있는 하늘과 점점 가까워오는 분향소 앞에서 이를 악물며 무언가를 견뎌내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사진 앞에 섰을 때, 기를 쓰고 내가 참고 있는 것이 무언인지 깨달았다. 슬픔이었다. 누군가는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고 누군가는 젖은 눈을 내리깔며 묵념하고 있을 때 나는 울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눈가가 뜨거워지고 목구멍이 따가웠지만 꾹꾹 눌러 참고 버텼다. 너무 많은 사진들 앞에서 꽃을 어디에 둘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어느 남학생 사진 앞에 올려놓고 터덜거리며 나왔다. 그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인사도, 눈물도 미완성인 채로 나는 떨어지지 않는 묵직한 침묵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왔다.
  
  304개의 죽음이다. 3년 전, 304개의 삶이, 그들과 연관된 수백 개의 삶이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세 번의 겨울이 지나서 세월호는 처참한 모습으로 뭍으로 올라왔다. 참사로 희생된 어느 학생의 유가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가슴에 묻어요. 이제 그 기억을 덮고 묻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누군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도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버틸 수 있어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도, 치유도, 진상규명도. 그 어느 것도 완전한 게 없었다. 그래서 난 울 수가 없었다. 아니,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아직 버티고 있는데, 처참한 몰골을 한 선체를 보고도 간절하게 진실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치유도 용서도 없었는데, 그 고통의 테두리 밖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내가 먼저 엉엉 울어버릴 수 있는가? 이대로 죽음을 애도하기만 하면 그걸로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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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일 광화문


  분향소에 갔다 온 지 십여 일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고통이 무엇인지, 애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나는 입을 닫고 있었다. 관련된 글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노트북 앞에 앉아 몇 문장을 끄적거리며 시작해보는 것은 여전히 모르겠기 때문에, 더 장황하게 헤매기 위해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감히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애도는 무엇이고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 세월호를 보며 내가 느끼는 고통은 무엇일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 현시대와 정치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소외. 그 문제들을 보며 내가 느끼는 고통이 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똑같이 공유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공감이 정말 그런 뜻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없어져야 하는 단어다.
  고통스럽게도, 나는 당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의 아픔을 모른다. 당신과 관련하여 내가 흘릴 수 있는 눈물은 당신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당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속상해졌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나와 당신, 나와 타자는 같은 이유로 울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의 감정과 상처를 똑같이 느낄 수 있고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눈물은 타인을 위한 진심어린 애도의 의미를 잃어간다. ‘나’라는 사람은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 슬퍼 ‘해줄 수 있을 만큼 시혜적인 인간’이라는 것만 남을 뿐이다. 그때의 슬픔은 감정에도 경험적 우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발생하는 오만이다. 공감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착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민으로 그쳐서도 안 된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죽음과 희생을 보고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음을, 의식적이지 못했음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즉, 고통에 대한 객관적 사유가 일어난다. 이는 타인의 감정에 동일화되기 위함이 아니다. 고통의 조건을 사유하는 것, 고통이 유발하는 슬픔 속에 빠져들지 않고 고통 자체를 직시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이미 사라진 이들 혹은 말문이 막혀버린 이들을 위해 무엇을 발견하고 함께 증언할 수 있는지를 시도하는 것이다. 시대문제, 사회문제에 관한 이러한 의식적 시도는 개인의 고통을 해체시키거나 타인의 감정을 자의적으로 정의내리지 않고도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져버리지 않는 태도의 출발점일 수 있다고 본다. 인간에게서 인간은 먼 타자 아득한 타자가 아닌, 우리는 똑같다며 동일성의 폭력을 휘두르는 타자가 아닌, 단지 가까이에 서서 서로의 아픈 경계선을 어루만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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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SBS 뉴스


  세월호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고통에 다가가는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또다시 4월이 이대로 사라지더라도 기억해야 한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유가족들이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때, 그게 너무 아프기 시작할 때, 진짜 자신의 소리를 내며 억눌린 눈물까지 모조리 쏟아낼 시간이 왔을 때 그들을 보고 나도 따라 울 것이다. 눈을 부릅뜬다. 기억하는 이가 있는 한, 세월호는 여전히 버티는 중이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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