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 예술인의 발자취 (1)

글 입력 2017.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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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과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남기고 간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자연을 즐기고 문학을 배워봅니다.

청계천의 발원지에서 겸재정선의 진경산수화길,
인왕산 수성동 계곡 주변을
환경정화 모니터링 합니다.

이동경로
부암동 주민 센터 → 안평대군 이용 집터
창의문 터 → 청계천 발원지 → 현진건 집터
윤동주 문학관 → 시인의 언덕 → 수성동 계곡
윤동주 하숙집 터 → 이상 집터 → 이상범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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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이용 집터

세종의 셋째 아들 이용은 창덕궁에서 태어나 형 수양대군과 동생 임영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안평은 시문, 그림, 가야금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서 당대 최고의 명필로 꼽혀 풍류왕자라고 하였습니다.

수성동 상류 계곡에 집을 지은 다음 경복궁에 들어가니 아버지 세종이 ʻ비해당ʼ 이라는 당호를 내려주었는데 그 의미는 안평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훗날의 문종)이 즉위한 뒤에도 ʻ게으름 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ʼ는 당부를 하기 위하여 ʻ비해ʼ 두 글자를 따서 당호로 내려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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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이 어느 날 비해당에서 도원을 거니는 환상적인 꿈을 꾸는데 이 꿈속의 풍경을 당대 화가 ʻ안견ʼ 으로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펴놓고 감상하다가 ʻ몽유도원도ʼ라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1454년(단종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였고 이때 안평대군은 지지기반을 잃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받아 강화고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교동도로 유배되었고, 거기서 36세 일기로 사사되었습니다.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서른여섯에 독배를 받아 마신 안평대군, 사람마다 갈 길은 서로 달랐지만 기린교 밑에 흐르는 물소리는 지금도 여전 합니다.



창의문 터

서울 성곽의 4소문 가운데 하나로 1396년(태조5년)에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고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것을 영조 17년(1741)에 다시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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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목계를 달아 놓은 것입니다.

동소문 문루에 봉황새를 그려놓은 것이 여타 문과 다른 특색이듯이 창의문 추녀에 나무로 닭을 깎아 매달아 놓은 것 역시 다른 문과 유를 달리하는 모습인데, 그 까닭은 문밖의 지세가 지네와 유사한 상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꼴을 만들어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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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실 중에서 인조반정에 관한 것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향해 문을 깨뜨리고 입성한 뒤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창덕궁을 무난히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당황한 광해군은 궁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체포되어서 강화로 귀양 보내지고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인조입니다. 후에 영조는 이 거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고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어 놓았고 지금도 그 현판이 문루에 걸려 있답니다.



현진건 집 터

현진건은 1930년대 이후에 이 집에 살면서 주로 장편소설들을 발표했습니다. <무영탑>, <흑치상지>는 동아일보에 연재 되었던 것들입니다. 또한<선화공주> 등을 이 시기에 발표했습니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중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동아일보를 사직합니다.

그는 출옥 후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쳤고 그러다가 친구의 꼬임에 빠져 투기로 재산을 탕진하면서 술과 가난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여기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안평대군을 존경해 그가 살았던 집터에 집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1943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이 집은 60여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2003년에 헐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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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현진건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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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이후의 모습


항일 문학가 빙허 현진건

자전적 소설 <빈처>가 염상섭의 극찬을 받으면서 문학 동인 ‘백조’에 들어가게 되고 대표작인 <술 권하는 사회>와 <운수 좋은 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합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 했던 형의 죽음으로 현진건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저항하기 시작했고, 생활은 더 궁핍해집니다. 결국 1943년 장결핵과 폐결핵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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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공감, 재미'의 머리글자를 딴 '소공재'는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소통하며 공감을 나눔으로써 재미를 추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유산진흥원의 산하 봉사단체입니다.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호사항을 고취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공익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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