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 예술인의 발자취 (2)

글 입력 2017.06.0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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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과
아름답고 소중한 삶을 남기고 간
예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자연을 즐기고 문학을 배워봅니다.

청계천의 발원지에서 겸재정선의 진경산수화길,
인왕산 수성동 계곡 주변을
환경정화 모니터링 합니다.

이동경로
부암동 주민 센터 → 안평대군 이용 집터
창의문 터 → 청계천 발원지 → 현진건 집터
윤동주 문학관 → 시인의 언덕 → 수성동 계곡
윤동주 하숙집 터 → 이상 집터 → 이상범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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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소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연희전문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위치한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의 작품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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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매일 올랐던 인왕산은 그의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종로구에서 1974년부터 쓰였던 수도 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하여 윤동주 문학관을 개관하게 됩니다. 제1전시실은 윤동주의 사진과 친필 원고, 영인본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은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공간 <열린 우물>로, 그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과 바람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은 그가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 감옥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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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1941년 11월,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자신이 써놓은 시 가운데 18편과 '서시'를 붙여《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엮었습니다.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는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생체실험의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했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 언어로 시를 썼던 저항 시인입니다. 그의 시를 통하여 인간의 따스한 마음과 깊은 정신을 느껴보길 바랍니다.



수성동 계곡

수성동은 조선시대부터 수성동으로 불렸으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성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된 곳입니다. 수성이란 물소리가 좋다 라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가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라는 글을 썼고, 겸재 정선은 장동팔경첩에 이곳 수성동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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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일대의 모습을 사실대로 묘사한 <수성동>
겸재 정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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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수성동 계곡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라는 우리 고유의 화풍을 개척한 인물로서 정선의 고조부 때부터 도성의 서쪽, 즉 인왕산 기슭에 터전을 잡고 살았습니다. 중국의 산천이 아닌 조선의 산천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등학교가 위치한 북안산 서남쪽 기슭 인근입니다. 정선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같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 많은 것은 그의 근거지가 바로 인왕산 일대였기 때문입니다.

정선은 가난한 양반 가문의 맏아들로 태어나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성리학과 시문 수업 받았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안동 김문의 인사들은 그를 후원했고, 정선은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를 여러 번 그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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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정선이 남긴 400여 점의 그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왕제색도>. 1751(영조 27)년에 그린 것으로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순간을 포착하여 느낌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상 집 터

이상(1910~1937년)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1930년대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입니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풍기면서 인간의 모순됨을 유희와 역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난해 시 '오감도'는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연재의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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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으로 끝난 천재작가 이상. 이상의 대표적인 작품은 「오감도」와「날개」가 있습니다. 이상이 23살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꽤나 큰 한옥이고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였는데, 현재 통인동에 있는 '이상의 집'은 이상이 살았던 집터의 일부입니다. 이상의 처녀작으로는 시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가 있고 1932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한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는 처음으로 '이상'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그의 본명은 김해경입니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문학에 스며있는 감각의 착란,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됩니다.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해명을 가능하게 하고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시는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겼으며, 그는 인간의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구제를 꾀한 시인이었습니다.



이상범 가옥 및 화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1897~1972년) 선생님이 살았던 집과 작품 활동을 하던 화실입니다.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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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산수화의 맥을 이으면서도 한국의 산천을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려내 향토색 짙은 작품을 선보인 이상범 선생님. 이상범 가옥은 1930년대에 지은 도시형 한옥 건물로 그가 43년간 거주한 곳입니다. 청전화숙으로 불리는 화실은 대지 20평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8평 남짓한 단층 양옥 건물로 이상범 선생님이 사망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34년간 작품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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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화실입니다. 이 곳 에서 배렴과 박노수 등의 후학을 양성하였고, '청전양식'이라고 불리는 작품 세계도 완성되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화풍은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주었고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여 한국적 공감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값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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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범, 1967년 <임천>
전형적인 우리네 산천을 담은 자연 풍경에 여름날의 청아한 운치를 불어 넣은 대작 산수화입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소공재 소개

'소통, 공감, 재미'의 머리글자를 딴 '소공재'는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소통하며 공감을 나눔으로써 재미를 추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유산진흥원의 산하 봉사단체입니다.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호사항을 고취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공익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ARTINSIGHT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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