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내면의 움직임에 대하여

글 입력 2017.06.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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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인과 크게 다투거나 이별했을 때 우리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술을 진창 마시기도 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잊어보려 하기도, 지인들에게 상대의 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 역시 이러한 외적인 반응이나 행동 또는 태도를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하지만 과연 이 모든 것들이 오롯이 상대에 대한 진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표면으로 베어나오는 모든 것들은 속마음과 오롯이 같을 수는 없다. 개인을 둘러싼 상황이나 주변 사람과의 접촉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슬퍼 보이지만 속으론 홀가분할 수도 있고, 사랑이 증발해 버린 것 같다가도 상대의 자취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겉잡을 수없이 싱숭생숭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핵심은 마음이 아닌가. 괜히 뒤숭숭한 것도, 화내고 욕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제껏 수많은 로맨스들은 포도알이 아닌 포도껍질을 그리는 데 오랜 세월을 허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피상적임, 이런 낭비에 지쳐 반기라도 들고 싶었던 건지 미셸 공드리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다름 아닌 조엘이라는 한 남자의 내면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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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터널 선샤인>의 남녀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여느 연인들이 그러하듯 시간이 갈수록 권태로움에 빠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심한 갈등을 겪게 되고, 충동적인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인 라쿠나 사에 의뢰해 조엘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만다. 하지만 조엘은 여전히 클레멘타인을 사랑했고 다시 잘해보고 싶었기에 그녀가 일하는 서점을 찾는다. 당연히 그녀는 조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그녀가 라쿠나 사를 찾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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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출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인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를 자신의 삶에서 없애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기억을 지우기 전 라쿠나 사의 원장과 상담을 할 때의 그는 단지 덤덤하고 무표정할 뿐 어떤 사랑도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조엘이 바라는대로, 라쿠나 사는 기억을 체계적으로 삭제하는 과정에 착수한다. 우선 클레멘타인을 떠올릴 수 있을만한 물건들을 모아놓고 각각의 물건에 조엘의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측정해 기억회로를 만든다. 그런 다음 조엘이 자는 동안 미리 파악해둔 지도를 따라 최근 것부터 차례대로 기억을 지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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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사실 조엘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단순한 기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기억에 바탕을 두고 라쿠나 사가 만든 루트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여기서의 시공간은 조엘의 의식과 분리된 채 여러 가지 변형과 왜곡이 자유자재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엘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라쿠나 사의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당신이 만든 허상일 뿐이야!” 이 영화의 무대는 그래서 기억의 집합체가 아닌 조엘의 무의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거실에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겨울바다 위에 떡하니 침대가 놓여져 있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위의 캡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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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던 현실에서의 조엘과 달리 무의식속의 조엘은 라쿠나 사의 손길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움직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라쿠나 사에게 스스로를 내맡겼으나 그렇다고 조엘에게서 사랑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분노에 자리를 빼앗긴 사랑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솔직하고 격렬하게 표출된다. 기억회로를 이탈해 도망치는 그를 보며 라쿠나 사 직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항하는 거 같은데요.” 말 그대로 무의식에서의 조엘은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그녀와 있던 기차역이 사라지려고 하면 기차역 밖으로 달아나기도 하고 삭제되는 그녀를 꼭 붙들어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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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만 아니라 조엘은 자신을 좀 더 찾기 어려운 기억에 숨겨달라는 클레멘타인의 요청에 따라 그녀와 아예 무관한 기억으로 숨어버리기도 한다.  이제껏 기억회로 상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그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조엘의 뒤엉킨 머릿속이 단순한 기억이 아닌 무의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그가 살던 집 부엌으로, 자위를 하다 엄마에게 들켰던 기억으로, 마지막으로는 동네 아이들의 강요에 못 이겨 새를 죽였던 기억으로 도망친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조엘은 점점 더 부끄러운 내면으로 파고든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사랑의 무게만큼이나 깊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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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클레멘타인에 관한 조엘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격동의 밤을 보낸 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늘 그래왔듯이 출근길에 나선다. 다만 왜 자신의 일기장이 찢어져 있는지(기억회로를 만들 때 일기를 찢어갔다), 왜 자동차에 흠집이 나있는지(클레멘타인이 실수로 낸 것이었다)를 모를 뿐이다. 그런데 기차역에서 조엘은 뜬금없이 회사가 아닌 몬탁(클레멘타인을 처음 만났던 바다)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또 한 번 클레멘타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물리적인 기억은 상실되었지만 조엘의 내면은, 무의식은 남아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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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웠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클레멘타인은 그를 떠나려 한다. 똑같은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는 그녀를 잡으며 조엘은 차분히 답한다. “괜찮아요."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괜찮음보다 조엘의 괜찮음에 더욱 애틋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막연한 느낌이 아닌 내면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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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배제했지만 사실 이 영화엔 조엘과 클레멘타인말고도 또 다른 애정선이 존재한다. 라쿠나 사의 원장을 향한 직원 메리의 사랑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부남이기에 그녀의 사랑은 불순하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과거 메리와 원장 두 사람은 내연 관계였으며 영화에서 보여지는 메리는 모든 걸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원장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지운 상태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불륜을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죽어도 없고, 감독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영화는 메리의 선택을 통해 무의식의 내밀한 힘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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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대부분의 작품들이 '현실에서의' 행복, '현실에서의' 사랑, '현실에서의' 슬픔만을 다루는 동안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무의식으로 시작해 무의식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특별한 감상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무의식이 어떻게 요동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당신이 알지 못해도 무의식은 존재하며 부인하려 해도 결국 그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말 것이라고. 찢어진 일기장처럼, 자동차에 난 흠집처럼.


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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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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