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보암보암 해야 하는 이유_영화 보이후드

글 입력 2017.06.30 17:5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보암보암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


 2016년 11월 10일, 보암보암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얻게 된 기쁨과 포부를 담아 첫 글을 썼었다. 문화예술에 담긴 감정과 느낌의 모습을 내 손끝으로 다시금 풀어내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에세이가 담장 아래 말라 떨어진 꽃잎들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때로는 이곳이 나의 일기장 같아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 부끄럽기도 했으며 이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일기가 되기를 바랐다. 지난날들 중 언젠가 나를 뒤흔들어놨던 감정이 지금은 거뭇거뭇하게 썩어가고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또 다시 물기어린 생화로 피어나기를 꿈꾸었다.

 여유로움, 불안함, 열등감, 사랑, 부끄러움, 이상적임, 환상, 솔직함, 배려, 오글거림...이제껏 보암보암을 쓰는 것은 스쳐가는 감정과 느낌을 이 좁다란 백지에 끌어다 앉혀 놓는 일이었다.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암보암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은 다발이라는 것 말고 이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이것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달 간의 휴재를 앞둔 마지막 기고에서 그에 대한 답을 풀어내보려 한다.


173044582.jpg

 
 영화 <보이후드>의 상영시간은 약 2시간 45분. 촬영기간은 총 12년이다. 매년 4일씩 15분 분량을 작업했고 때문에 영화에서 15분은 대략 1년 정도가 된다. <보이후드>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9년 간격으로 남녀의 사랑을 그린 비포 시리즈< Before Sunrise >< Before Sunset >< Before Midnight > 역시 제작했다는 사실을 되새겨보면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영화 안과 밖의 시간을 넘나드는 방식은 그의 주특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포 시리즈의 주인공 제시와 셀린이 18년을 지새우는 동안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역시 각자의 삶에 맞게 늙어갔듯이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과 이를 맡아 연기한 엘라 콜트레인도 6살에서 18살이 되기까지 함께 성장해간다.


image.png
 
image (1).png

 
 싱글맘인 올리비아는 어려운 형편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실수에 실수를 거듭한다. 특히 두 번의 재혼, 그리고 실패는 부모님의 손길이 가장 간절할 나이에 메이슨과 그의 누나 사만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두 번째 아빠였던 빌이 주정뱅이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으며 세 번째 아빠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사를 가고, 학교를 옮기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가 또 헤어지고...올리비아의 기나긴 방황으로 인해 남매조차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그들의 인생사에 변함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생물학적 아빠인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의 존재다. 올리비아와의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지만 그는 나름의 삶을 꾸려가면서도 주말이 되면 아이들과 캠핑을 가거나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등 메이슨과 사만다를 절대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내놓지 않는다.

 보통의 아이들과 비교해봤을 때 메이슨의 어린 시절은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세 명의 아버지를 거쳐 간 일이나 여러 번 전학을 다니며 종종 따돌림까지 당했던 일은 그 중 하나가 트라우마로 남아 메이슨의 삶을 좌지우지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는 거대한 태풍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흐름 속에 스쳐지나갔던 몇 가지 순간과 거기에 담긴 감정들을 덤덤하게 조명한다.

 
image (2).png
 
 이혼한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메이슨과 사만다의 시선.  

image (3).png
 
교수 대 학생으로 만난 두 번째 남편 빌과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메이슨.
그가 느끼는 묘한 감정, 그것이 드러나는 표정.

image (5).png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잠시 집을 떠난 올리비아를 찾기 위해 아이들의 핸드폰을 뒤지는 빌.
그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어버리던 일.

image (4).png
 
빌에게서 도망치느냐 갑작스럽게 전학을 가던 날.
어쩔 수 없다는 걸, 엄마도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감출 수 없는 속마음.

image (6).png
 
남자친구가 생긴 사만다에게 피임에 관한 조언을 해주는 아빠.
부끄러움에 빨개지는 볼과 귀.

image (7).png
 
 분위기에 취해 혼자만 간직했던 어두운 생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던 날.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고 공감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다.




 어떤 시련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로 남아 누군가의 평생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하지만 기약 없이 흘러가는 인생 속에서 대부분의 사건들은 결국 과거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기 마련이다. 당시엔 그로인해 무너졌을지라도, 세상을 원망했을지라도 종래에 그들은 점차 옅어져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연찮게 찾아오는 일상의 찰나들, 순간들, 가슴을 채우는 감정들은 오히려 가면 갈수록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하는 것이다. 2년 전 그토록 스트레스를 주었던 한 강의에서 받은 성적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첫 수업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성격개조(외향적으로 변했냐는 뜻) 좀 했냐고 물었던 순간의 당혹스러움은 잊을 수 없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계셨을 때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일보다도 손가락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빠 대신 귀를 파드렸던 게 여전히 아프다. 처지를 비관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주저앉았던 날들은 이제 아무렇지 않지만 매번 나를 가만히 안아주던 그 사람의 품을 떠올리면 다시금 따듯해진다.

 어쩌면 영화는 메이슨의 삶에서 커다란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인생을 길게 놓고 보았을 때 시련 그 자체보다도 사소한 순간과 감정이 모이고 또 쌓여 하나의 인간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떻게 현재의 내가 되었고 무엇을 보고 느끼며 살아왔으며 앞으로는 무엇으로 성장하고 늙어갈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자 답이다.


image (8).png

 
 어엿한 성인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던 첫 날, 메이슨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는 대신 기숙사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하이킹을 떠난다. 그 중 한 명인 니콜이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것 같다고 말하자 메이슨은 이렇게 답한다. 

“It's constant. The moment is just like always 'right now'."
 시간은 영원하고 순간은 늘 지금을 의미해

 어떤 순간을 회상하거나 반추하는 일이 애틋하고 가끔은 불편한 이유가 그래서일까. ‘순간’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때, 우리는 그 순간의 시공간으로 옮겨져 그것을 ‘지금’으로 살아내니 말이다. 그렇게 하면 침잠되어 있던 당시의 감정 역시 재차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는 필름이 돌아가는 내내,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영화 <보이후드>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존재하게 했음에도 쉽게 잊히곤 하는 순간들과 거기에 묻은 감정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지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아마 <보암보암>이 보암보암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썩어 거름이 되어버린 꽃잎들을 끈질기게 다시 생화로 피워내어 읽는 이가 자기 존재의 내밀함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온 길을 한 번 쯤 되돌아볼 수 있도록.




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아트인사이트 tag.jpg






참조 : 씨네21



[반채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