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헤매는 사람들, 집은 어디인가 [공연예술]

국립극단의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에서 '널위한날위한너'를 보고
글 입력 2017.07.1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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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일부터 시작된 국립극단의 '한민족 디아스포라' 전은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활동 중인 한인 작가 다섯 명의 대표작들을 만나볼 수 있는 축제로 작품들은 이민, 탈북, 해외입양 등 대한민국 밖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까지 설명으로 봐서는 어떤 연극들을 볼 수 있는 축제인지 감은 잡힐 듯 한데 내가 그랬듯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디아스포라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너머'를 뜻하는 'dia'와 '씨를 뿌리다'라는 의미가 있는 'spero'가 합쳐진 말로 본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교의 전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최근에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서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관습 및 규범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집단이나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단어가 낯설지라도 일제강점기때 있었던 만주, 연해주 이주와 강제징용, 그리고 6.25전쟁 후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미국으로의 이민 등 우리나라의 이민사를 떠올려 보면 우리는 세계 곳곳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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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디아스포라 전에서 내가 봤던 '널위한날위한너'는 탈북에 대한 이야기이다. 북한에 사는 자매 민희와 준희는 가족을 잃고 먹고 살 길마저 막막해지자 북한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동생 준희는 먼저 국경을 넘어 미국에 정착하게 되지만 언니 민희는 망설이던 중에 '과거의 우물'에 빠져 버린다. 과거의 우물에서는 바깥 세상의 몇 년이 고작 몇 시간에 불과하다. 이 때부터 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동생이 낯선 미국 땅에서 미래를 살아가는 동안 언니는 익숙하지만 후회로 가득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무대 연출 또한 언니가 있는 우물 속 과거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꾸미고 동생이 있는 미국은 매우 현실적으로 꾸밈으로써 둘을 뚜렷하게 대비한다.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 헤매던 둘은 각자 무언가를 깨닫는다. 애써 언니를 잊은 척 하며 살아가던 동생은 자신이 아무리 미국 사회에 적응해 미국인처럼 살아간다 해도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고향, 언니를 남겨두고 온 북한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니는 북한이 삶의 터전이고 사랑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방황하던 둘은 결국 국경에서 다시 만난다. 동생은 언니를 구해주러 왔다 말하며 이번에는 언니가 먼저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돕는다. 그러나 국경을 넘을 때는 재물이 필요한 법. 국경은 동생을 삼켜버리고 언니만 남한으로 들어온다. 극은 홀로 남겨진 언니가 남한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쓸쓸하게 식탁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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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 평생을 살며 되뇌는 이 질문의 답은 내가 '언제' '어디에' 존재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있는 시간과 공간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널위한 날 위한 너'의 두 자매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은 뒤틀려 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찾지 못하고 헤매인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고향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자리잡은 타지가 집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익숙한 고향에 머물자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고 타지에서 살아가자니 고향에 남겨두고 온 것들이 발목을 잡는다. 이 모순은 북한이탈주민 뿐만이 아니라 타의로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야 했던 모든 디아스포라가 직면하는 상황일 것이다.

흥미로웠던 건 남한 또한 그들이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타지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60여년이나 분단된 상태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 사용하는 언어와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해도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남한이 생판 모르는 외국 못지않게 낯선 곳으로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디아스포라'라고 하면 언제나 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만을 생각했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들의 입장, 즉 우리나라 내부에 존재하는 디아스포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당장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과 관련된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만 생각해봐도 외부인에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나라라는 걸 실감할 수 있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계속 환상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던 '널위한날위한너'가 결말에 이르러 차가운 현실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현실의 배경이 다름아닌 우리나라임을 깨달았을 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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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인력난 발생 및 국제결혼의 증가로 우리나라에 체류 중이거나 귀화하는 외국인은 점점 늘어나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반면 국민들의 인식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결을 잘 하는 국민성 이면에는 똘똘 뭉쳐 외부인을 배척하는 모습이 있고 그 기반에는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버티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는 북한이탈주민이나 중국동포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처럼 입맛에 맞게 갖다 붙이는 것일 뿐이다.

이미 왜곡될 대로 왜곡된 단일민족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시대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왕래는 갈수록 잦아지고 태어난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 전쟁이나 종교분쟁과 같은 극단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잠재적 디아스포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계속해서 폐쇄적인 집단의식을 유지한다면 '널위한날위한너'의 민희와 같은 사람들은 연극의 결말처럼 영원히 집을 잃어버린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는 시대, 우리가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면 우리 역시 타인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연극이 의도한 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널위한날위한너'의 결말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디아스포라' 용어설명참조: 두산백과 '디아스포라'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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