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영화]

악순환의 교육은 이제 그만!
글 입력 2017.07.2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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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오피니언이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입니다. 이 영화는 복지, 노동, 교육, 인권 등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주로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필자의 의견을 적었습니다.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
(Where to Invade Next, 2015)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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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적 교육’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의 교육은 조기교육, 사교육, 입시경쟁, 성적 스트레스 등 한국 학생들이 겪고 있는, 그리고 겪어야만 하는 교육을 이야기 한다. 경쟁 사회가 낳은 이 잔혹한 교육 전쟁은 단순히 교육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과 삶의 질에도 이어진다. 이렇게 부끄러운 교육 현황을 ‘한국적 교육’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참으로 다른 나라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누구는 우리나라의 뜨거운 교육열이 대단하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아이들에게 경쟁을 부추기고 스트레스를 퍼붓는 배경을 자세히 알지 못해 하는 말일 것이다. 한국은 지금, 교육열이라는 말로 모든 아이들을 폭력 속으로 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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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 포스터


   그런 의미에서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는 충격적이었다. ‘한국적 교육’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리고 이상적 교육은 어떤 식으로 실재하는지 알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 속 그 어느 장면에도 한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마이클 무어의 물음 속에서 한국의 교육을 찾을 수 있었다. 이상과는 먼, 그리고 폭력과는 가까운 ‘한국적 교육’을 말이다.





- 경쟁 속 교육은 이제 그만

  아이들은 하루 종일 사교육과 공부에 시달린다.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입시 경쟁을 치루는 방법은 대동소이하다. 모두들 교사가 일러주는 이론과 기출 문제를 수동적으로 받아 적고, 머릿속에 억지로 주입한다. 가끔 저마다의 방법으로 공부하거나 공부를 즐거워하는 학생들이 있으나 극히 드물다. 좋아하는 과목에는 밖에 나가서 뛰노는 ‘체육’을 많이들 적는데, 고등학교 수업 속 ‘체육’은 주요 과목을 자습하는 시간이다. 뛰노는 것이 금지된 아이들은 옆 친구에게조차 경쟁심을 느끼며 매일을 살아간다. 경쟁 사회가 낳은 폐단이다. 주입식 공부에만 익숙해진 아이들은, 쓰고 말하는 주체적 행동에 어려움을 느낀다. 진로 결정에 있어서도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을 반복한다. ‘한국적 교육’ 속 아이들은 그렇다. 경쟁 속 학교를 살아가고 있다.

  어릴 적, 수많은 어른들은 우리에게 “남들보다 더 잘나져야 한다”,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라는 말들로 경쟁을 부추겼다. 비평준화 지역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서열화 된 학생들 틈에서 어떻게든 앞으로 가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이유나 꿈도 없이 공부에 매진해야 했다. 이것은 필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시대, 이 세대가 겪고 있는 ‘한국적 교육’의 현황이다. 많은 학생들이 필사적으로 공부한다. 목적 없는 항해처럼. 그렇게 항해할 수 있는 동력은 다름 아닌 경쟁이다. 그리고 경쟁으로 짜낸 동력은 본체를 지치게 만든다.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억지로 모터를 돌리다가 결국 멈추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핀란드의 교육은 놀라웠다. 숙제도 없고, 객관식 문제도 없다. 등수도 없고, 등급도 없다. 주입식 교육보다는 토론과 토의를 통해 터득한다. 필자가 학창시절 그토록 찾던 꿈의 학교가 바로 핀란드에 있었다. 우리 사회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이 아닌 협력이다. 서로가 가진 장점을 이어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가는 것이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다. 인재마다의 장점을 찾아 배치하고, 뚜렷한 목표의 협력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경쟁 사회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지만, 협력 사회는 모두에게 행복한 삶을 안겨준다. 폭력적인 교육 전쟁을 이제는 멈춰야만 한다.

  이제는 학생이 주인공인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교사의 권위는 학생들을 수동적이고, 경쟁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학생들이 만드는 수업, 학생들이 만드는 학교는 학생들이 교육의 주인이기 때문에 학생들만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학생들에게 학교는 즐거운 공간이자,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옆 사람과 토론하며 의견을 수립하고, 주장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오직 학생들의 생각과 배움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의 이익, 혹은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의 이익, 더 나아가 이 사회의 주도 세력들의 이익으로 학교가 꾸려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말을 잘 들을 인재를 뽑기 위해 존재하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뽑히기 위한 경쟁은 이제 멈춰야 한다.





- 빚더미 속 교육은 이제 그만

  우리나라의 교육비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그리고 팽창하는 교육비는 부모와 학생에게 부담으로 돌아온다. 특히 어마어마한 액수의 대학 등록금은 사회로 나가기 전인 청년들에게 빚더미를 안겨준다. 실질적 교육비는 계속해서 오르고 있으며, 교육부터 취업까지 드는 교육비용은 매년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는 눈에 보이는 비용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어 원래 지급해주던 장학금의 액수를 줄이거나, 수혜 학생들의 범위를 좁히는 것 역시 개개인의 교육비용의 팽창으로 연결된다.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부담을 지는 학생들은 꿈을 꿀 나이에 소비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학생들은 더 공부하고 싶거나, 더 배우고 싶어도 돈의 한계에 봉착하고, 빨리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만을 짊어진다.

  반면 프랑스는 대부분의 보육이 무료로 주어진다. 물론 그만큼의 세금을 내지만, 세금을 내고 보육을 무료로 받는 것이 팽창된 교육비를 납부하는 것보다 절약이다. 슬로베니아는 심지어 대학 등록금이 무료다. 학생들은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 가난이 가로막지 않는 기회를 안고 공부와 연구에 더욱 더 매진한다. 교육은 이래야 한다. 가난하다고 덜 배우면 안 된다. 가난하다고 더 뒤에 있는 출발선에 서서는 안 된다. 학교는 이래야 한다. 사회로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빚더미에 앉히고 죄책감과 부담감을 안겨주어서는 안 된다.





- 인권 없는 교육은 이제 그만

  ‘잠재적 교육’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이것이다’ 명확하게 교과서에 적혀있지 않지만, 교육 중 학생들의 무의식에 스며드는 교육을 이야기한다. 교과서 속 집안일을 모두 여성이 하는 사진, 위축된 모습의 미혼모 사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잠재적 교육을 염두에 두어 교과서를 바꾼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국의 교과서는 여전히 혐오와 차별에 물들어있다. 이러한 혐오와 차별은 학생 개개인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수립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준다. 특히 기술·가정과 같은 교과의 책은 여전히 기술은 남학생 위주로, 가정은 여학생 위주로 편집되어 교육되고 있다. 성평등 교육뿐만이 아니다. 성교육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성을 신비롭고 쉬쉬해야 하는 존재로만 인식하게 하는 성교육은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킨다. 청소년과 성을 떼어놓으려는 교육은 청소년에게 억압만을 안겨주고, 사회적 인식에서 청소년의 성을 배제시킨다.

  교과서뿐만이 아니다. 교칙 역시도 학생들의 인권을 얼룩지게 하고 있다. 융통성 없는 동/하복 일정, 블라우스 안에 나시 규정, 외출복 금지, 스타킹 종류 규정, 구두 제한, 두발 규제 등은 학생들에게 오직 ‘단정함’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강요한다. 특히 여학생들은 나시, 스타킹, 구두 등으로 빈번히 인권 침해를 당한다. 교복 교칙뿐만이 아니다. 에너지를 아끼려는 정책으로 학교는 가끔 난방/냉방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환경은 지옥이다. 집중력은 바닥이 나고, 몸이 상하기 쉽다. 조금이라도 비실대면 어른들은 “우리 어렸을 적엔 ~”이라는 말로 학생들의 불편을 묻어버린다. 교칙이라는 이름 아래로 여전히 체벌이 이루어지는 곳들도 있다. 이제는 체벌이 금지되어 가지만, 그 관습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체벌이라는 이름의 전통은 단순히 아이들을 향한 훈계나 처벌을 넘어, 잘못에 대한 보복처럼 이루어진다.

  학교는 차별 없이, 혐오 없이, 인권 침해 없이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곳이다. ‘인권의 침해를 감수하고’ 배우는 곳이 아닌, ‘인권이란 무엇인지’ 배우는 곳이다. 인권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 교과서 혹은 교육 속에 혐오나 차별은 없어야 하며, 성교육 역시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칙은 학생들과 함께 결정해야 한다. 이미 프랑스, 튀니지, 핀란드 등지에서는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반면 한국의 교육과 사회는 인권 침해를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학생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 “지금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룬다.”와 같은 말들로 힘든 것을 당연시하고 강요한다. 학교 속 인권은 단 한 번도 빛을 발한 적이 없다. 이제는 바뀌어야만 한다. 지금의 학교는 지옥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악순환의 교육은 이제 그만!

  경쟁, 돈, 인권. 한국의 교육은 가장 안 좋은 환경에서 가장 안 좋은 구조로 교육이 순환되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결국 경쟁 속에서 승리하며, 특정 세력의 이익만 반복된다. 이토록 질긴 악순환이 없을 것이다. 한국적 교육은 돈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 층의 이익이나 부조리로 굴러가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악순환의 교육을 보고 싶지 않다. 한국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폭력을 멈춰야만 한다. 그리고 평등과 협력의 고리를 찾아야 한다. ‘악순환의 교육은 이제 그만!’ 교육에게 외치는 마지막 경고다.

  영화 평점을 매기는 사이트에 들어가 <다음 침공은 어디?>를 검색하면 “여러분 안심하세요. 한국은 침공으로부터 안전해요.”라는 코멘트가 가장 위에 뜬다. 영화를 본 사람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코멘트에 공감의 ‘좋아요’를 눌렀다. 슬픈 사실을 안심하라고 얘기한 코멘트 작성자의 재치에 슬쩍 웃음이 나면서도, 금세 울적해진다. 다행히도 그 다음 번에 있는 코멘트를 읽으니 조금 기운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얻어내야 하는 거죠.’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코멘트다. 맞다. 우리의 노력은 앞으로 더 질 좋은 교육과 사회를 위해 투자되어야 한다. 우리도 더 나은 사회를 꾸릴 수 있다는 전념 아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평등과 협력의 고리를 이어낼 것이다. 언젠가, 마이클 무어의 영화를 보며 “말도 안 돼”라는 감탄사의 연발보다는 공감의 끄덕임을 할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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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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