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옆’으로의 상상력 [도서]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를 읽은 후
글 입력 2017.07.30 19:1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옆'으로의 상상력
- 김도현 <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



들어가며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에 ‘샬롬의 집’이라는 장애인 시설이 있었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시설의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빨리 귀가하고 싶을 때면 친구들과 함께 마당을 지나서 집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다가 마당에 나와 있는 장애인을 보면 무서운 마음이 들어 뜀박질을 했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교내에서 유명한 장애인 학우가 있었는데, 말을 어눌하게 하다가 갑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며 교실에서 큰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화를 내곤 했었다. 그 학우를 보면서도 어린 마음에 ‘무섭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인이 다 되었을 때 '장애인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뚜렷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없다.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도보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스쳐지나가는 잔상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TV프로그램에 소개되는 가난하고 힘든 장애인의 삶,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웃의 모습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장애인’의 이미지로 강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나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장애인을 나와는 ‘다른’ 어떤 ‘대상’으로 간주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jpg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라는 기표와 기의
 
  사실 장애에 대한 나의 인식은 온전한 나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우리 사회가 ‘장애’라는 기표에 담고 있는 기의가 무엇인지에 따라 장애에 대한 나의 인식도 결정된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의 저자가 밝히고 있듯, ‘장애’라는 기표 자체가 비장애인을 기준점으로 거치적거리어 방해가 되는 것이거나, 신체상의 고장이거나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장애인은 이름 짓기 자체에서 낙인화가 된 것이다. 방해가 되는 것이나, 고장이나 무능력이라는 1차적 사전적 기의가 장애와 연결되고, 또한 여기에 사회적으로 어떻게 장애인을 소비하는지가 장애에 대한 2차적인 기의를 만들어 낸다. (주로 매스미디어를 통해 만들어 진다.)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한 ‘시혜와 동정’, 그런 장애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통한 ‘봉사’, 장애를 끝내 극복해내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통한 ‘극복’, 이 세 이미지가 장애에 대한 2차적인 기의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동정을 느끼기도 하며 장애인을 ‘정상인인 나’와는 다른 어떤 ‘대상’으로서 인식한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에서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세계에서는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존재한다. (중략) 장애인이 가진 다양한 차이들, 인간이 가진 다중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을 장애인으로 환원하는 것이 바로 장애인차별주의이다.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도서출판 메이데이, 2007, p.49-52)


  그리고 개인이 가진 다양한 차이들은 모두 장애라는 강력한 기표로 흡수된다. 그의 성별, 환경, 성격적 차이 등 인간 개인으로서 가지는 개별적 정체성들은 장애라는 것으로 수렴되어 이해된다. 저 사람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 거야, 혹은 저 사람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못하는 거야라는 판단 자체가, ‘장애인차별주의’라는 것이다. 차별이라는 것이 비단 언어폭력을 가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구분지어 평가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어떤 개인의 모든 정체성을 ‘장애인’이라고 함몰시켜 이해할 때 그것이 바로 차별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장애
 
  하나의 인간학적 속성 내지는 특질인 손상은 특정한 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장애라는 상태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위의 책, p.43) 손상이 있는 사람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일정한 사회 환경이며, 손상은 노동력의 상품화, 경쟁화, 효율, 개인주의 등등의 자본주의 사회 환경을 통해 장애라는 상태로 만들어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거대한 기계 속 하나의 객체로 작동하는 노동 주체를 원했고, 노동 주체들은 획일화되고 짜여진 구조 안에서 빠르고, 맞춰진 대로 일할 수 있어야했다. 그러면서 그 구조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 짓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을 할 수 없는 몸(the disabled bodied)이 현대의 장애(disability)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쟁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중증 장애인들이 생활하기가 어렵다. 경쟁과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간주되어 ‘일을 할 수 없는 몸’으로 규정된 장애인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배제된다. 그들은 교통수단을 어려움 없이 타고 어딘가로 이동할 수 있는 ‘이동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투쟁해야하고, 오랜 시간 동안 교육에 있어서도 소외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치인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논리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노동의 문제에서는 선진국에서 조차 많은 차별을 받아왔다. 또한 관리의 대상으로 시설에 수용되어 수많은 억압과 폭력에 노출되기도 했다.

 
“우리의 신체성 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위의 책, p.201)

 
  급진적 장애인 운동 단체들이 외쳤던 발언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를 느끼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단순히 배제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그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와 충돌한다는 인식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의 통합이 이루어져야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통합, 결론을 대신하여
     
  그렇다면 어떻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통합’이라는 것을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큰 차이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막연하게 인식해왔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삶의 양식에 맞춰 통합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합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필자가 밝혔듯 평등은 ‘같음(same)’이 아니라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 비장애인의 삶의 양식에 장애인이 무리 없이 적응하게 해주려 노력하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 장애인이 어떤 손상으로 인해 불편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소수일지라도 불편을 가진 구성원들을 위해 사안들을 개선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턱이 없는 버스를 만드는 것도, 또 일각에서 주장하는 수화를 공용어 중 하나로 채택하자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담론들이다.
 
  다시 앞서 내 얘기로 돌아가자면, ‘무서운’ 혹은 시혜의 ‘대상’으로 나는 장애인들을 간주해왔다. ‘나’와 같지 않다는 인식에 무서움을 느끼기도 하고, 신체적 제약으로 인한 고통을 보며 동정을 느꼈었다. 책 한 권을 읽고 내가 장애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건 어쩌면 상당한 기만일지 모른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닌 이상,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니까 말이다. 온전히 장애인들의 마음과 동일시하여 그들과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를 통감하고, 그들이 가진 손상을 인정하고, 그들 옆에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밖’에서 ‘옆’이 된다면, 그것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에디터 김나윤.jpg


[김나윤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