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그날은 구름이 처음으로 움직이던 날이었다.

2017.07.30 1.
글 입력 2017.07.30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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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름


내 생의 두 번째 방은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는 작았지만 창문은 컸기에 하늘을 담기에는 참 좋았다.

그런 하늘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명소는
창문 맞은 편에 있는 피아노였는데

엉덩이로 건반 8개 정도를 뭉개어 앉으면
높이도 적당, 위치도 적당해서
엄마 몰래 올라가서 앉아있곤 했다.

하루는 그림책과 함께 바닥에 엎드려 있는데
여태까지 만났던 구름들 중에
가장 큰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기에
그림책을 들고 서둘러 피아노 위로 올라갔다.

구름이 잘 보이는 위치를 잡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감상을 하려는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커다란 구름이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급히 엄마를 불러서
구름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전하니
엄마는 구름은 크지만 가벼워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고 설명해주셨다.

매일 같이 하늘을 구경했으면서
매일 같이 다른 구름이 하늘에 떠있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나에겐
그날은 구름이 처음으로 움직이던 날이었다.






#2 물웅덩이


비가 온 후,
날이 개면,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하늘의 창들이 열린다.

가로가 내 키보다도 훨씬 큰 창도 있었고,
짧은 다리로 폴짝 뛰어넘을 수도 있는 작은 창도 있었다.

등굣길이나 점심시간에
적당한 창이 있는 곳을 미리 봐둔 후,
학교가 끝나면 창을 가지고 놀곤 했다.

큰 창에는
장화를 신고 첨벙첨벙 들어가 소심한 물놀이를 했다.
모래 때문에 물이 탁해지면,
나가서 맑아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면 된다.

아니면 미리 접어둔 종이배를 띄워
가장 먼저 반대편에 도착하는 시합을 하기도 했다.

머리가 아파질 때까지 입으로 바람을 불거나,
책을 꺼내 부채질을 하거나,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온갖 방법을 다 쓰곤 했다.

작은 창에는
조심스레 발이나 손을 담구어 보곤 했다.

거울처럼 잔잔한 표면이
왠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창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에잇 이번에도 아니네
하는 아쉬움으로 물을 털어내곤 했다.






#3 야광팔찌


짧은 막대를 똑 꺾으면
어두운 곳에서 빛이 나는 막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동그랗게 둘러서 한쪽 끝을 다른 쪽 끝에 끼우면
팔찌가 되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빛이 나다니!
귀신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멋진 팔찌를 결국 버리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는데,
엄마는 빛이 하루면 사라진다고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선명한 빛을 내는 팔찌가 죽을 리 없다며
자기 전까지 차고 있다가 소파 위에 올려두고 잠을 잤다.

다음날
빛은 온데간데 없는 밍밍한 동그라미 하나와
야광팔찌 때문인지 가죽이 상해서 벗겨진 소파만 만날 수 있었다.

팔찌는 빛을 잃었고
소파는 상처를 입었고
나는 ‘영원한 건 없구나’ 를 배웠다.






#4 무지개


무지개라는 것을 처음 본 동화책에서는
무지개가 땅에서 시작되어
하늘로 솟았다가 다시 반대편의 땅으로 끝나는 모양이었다.

만일 무지개를 보게 된다면 재빨리 달려가
한쪽 끝을 타고 올라가 하늘에 올라보리라 하며
비가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하늘이 까매지고 소나기가 내렸다.
금방 그친 비에 엄마는 내가 그토록 원하던 무지개를
볼 수 있을 거라며 계단을 급히 내려가던 도중에 무지개를 만났다.

먹구름이 걷히고 빛이 쏟아져 들어온 아파트 입구 현관에
공중에 짧은 무지개가 있었다.

땅에서부터 시작되지도 않았고,
둥근 모양도 아니었으며 올라탈 수도 없었다.

빛 때문에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본 무지개는 색종이를 반으로 접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만난 무지개인데
꼭 집에 가져가고픈 마음에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앞에 가져와 펼쳐본 손안에는 빛만이 있었다.

아, 무지개란 잡을 수 없는 거구나.






#5 물풀


어릴 적에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보다는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종이 접기는 싫어했다.
납작한 종이를 입체적으로 접는 법을
납작한 책 속 사진을 보며 따라 하기란 참 어려웠다.)

종이를 붙이기 위해서 풀을 참 많이 썼는데
조금만 많이 발라도 종이가 쭈글쭈글 해지는 물풀보다는
깔끔하게 바를 수 있는 딱풀을 더 좋아했다.

하루는
멋지게 오려진 종이를 붙이려고 보니
딱풀을 모두 써버린 것을 알았다.

엄마에게 풀이 없냐고 물으니
물풀이 있으니 그걸 쓰라고 하셨지만
나는 물풀은 싫다며 짜증을 냈다.

다음 날 엄마가 날 위해 딱풀을
한 가득 사오셨다.

풀이 가득 생겨서 신난 마음과 동시에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슨 감정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그날은 엄마에게 종이로 하트를 만들어 선물했다.

아마 작은 사과의 표시였나보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전문필진 명함.jpg
 

[정연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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