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 8월엔 더이상 아로마 향이 나지 않는다 _캐나다 빅토리아(1)

글 입력 2017.08.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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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ctoria, Canada
07.03~07.28


 7월엔 통영을 가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었었다. 이젠 타국이 아닌, 내가 밟고 선 땅을 좀 더 거닐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쩌겠나. 캐나다에서 한 달을 살아볼 수 있다는데. 영어 수업도 듣고 여행도 할 수 있다는데. 장학금도 준다는데 말이다. 진부하지만 딱 들어맞는 표현,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간 모아둔 알바비를 탈탈 털고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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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이너하버. 빅토리아를 방문하면 꼭 한 번 들리게 되는 곳이다


 그래서 결국 7월, 캐나다 서쪽에 자리 잡은 한 섬으로 갔다.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빅토리아 섬. 겨우 한 달을 머물렀을 뿐인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밤을 그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편 두렵기도 한 향수의 시작을, 그리운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1. 잔디밭


 University of Victoria(Uvic)는 이곳에 있는 나의 학교와 꽤나 닮았다. 캠퍼스를 관통하는 원 모양의 도로도, 나무와 풀이 우거져 삭막한 건물들을 감싸 안고 있다는 것도. 다만 Uvic은 훨씬 더 넓고, 그 공간이 잔디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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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mper Soccer

 
 처음 잔디를 밟았을 때, 타국에 첫 발을 내려놓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낯선 느낌이 발가락을 간질였다. 조금 까슬했지만 동시에 촉촉했고 밟으면 밟을수록 푹신했다. 멀쩡한 벤치를 두고 잔디에 앉아 수다를 떨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친구들과 맨발로 배구를 하고 힘이 들면 내 집 안방인 냥 발라당 누워 하늘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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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디에 누워서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잔디는 단순히 미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밟지 마세요’라는 가시 돋힌 팻말을 품고 있는 금기의 구역도 아니었다. 잔디 역시 아스팔트나 흙길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의 생활 반경에 속했고 일상의 일부였다. 잔디밭을 맨발로 디딘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삶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커지는 일이었다.

 

2. Cadboro Bay


 바다와 접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 충청북도가 고향인 내게 물과 바다는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너무 먼 존재였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바다를 유영하는 ‘섬’ 이었고 Uvic에서 15분 거리에 좁지도, 넓지도 않은 적당한 해변이 있었다. 시간만 나면 그곳으로 향했다. 바닷물에 발바닥을 자박자박 적셔보기도, 그네를 타며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더듬어보기도,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삼아 누군가의 러브스토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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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바람에 실려 온 소금기에 머리칼이 늘러 붙는 게 익숙해질 때 쯤, 그곳의 밤하늘을 보았다. 바다 쪽을 향해 발을 두고 누우면 머리맡엔 북두칠성이, 왼편엔 카시오페아가 나를 받쳐주었다. 뿌연 안개마냥 떠 있는 별들 사이로 별똥별이 눈물처럼 뚝 하고 떨어졌다. 하루 동안 떨어지는 별똥별 중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난 스물셋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별똥별을 봤다. 얼마나 오랫동안 하늘을 보지 않았기에, 얼마나 하늘이 맑지 못했기에, 얼마나 빛이 심했기에 이제껏 지구를 찾은 별똥별 하나를 맞이해주지 않았던 건지. 머릿속이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그 날 밤하늘을 메운 별들만큼이나 빼곡하게.



3. 길


 길을 사랑한다. 그 길이 깨끗한지 지저분한지, 오래된 길인지 새로운 길인지, 번잡한지 조용한지는 적어도 내겐 중요치 않다. 모든 길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길은 설렘과 두려움을, 익숙한 길은 안도감과 지루함을 선사한다. 앞에 놓인 길은 과제이자 그 자체로 나아가야 할 이유라면, 뒤로 펼쳐진 길은 미련이고 아쉬움이며 한 발자국 더 나아갈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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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다운타운. 뒤로 이너하버의 바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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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아 어디에서나 무지개 빛 횡단보도를 쉽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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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너하버의 야경


 여행지에서, 그리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길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는다. 표지판과 간판, 그리고 가로등에 눈길을 빼앗긴다. 내겐 어색한 길이 익숙한 이들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길은 사람의 혈관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장소의 분위기는 혈관처럼 얼기설기 놓인 길을 타고 흐른다. 그래서 걷고 또 걷다보면 그 장소가 느껴지고, 또 베어들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면 자주,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네 침대에서 아로마 향이 나. Uvic에 있을 때 내 방에 놀러온 반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 아로마 향이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것을 맡아본지 오래 되었다. 아마도 아로마 향이라 불리는 그 냄새는 평소에 뿌리고 다니는 향수 냄새일 수도 있고, 밤마다 바르는 바디 로션의 것일 수도 있고, 빨래에 듬뿍 넣은 섬유유연제 냄새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지 간에 그건 내게서 비롯된 채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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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숙사 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 밤 10시가 되어야 해가 진다.


 8월이 되면 더 이상 아로마 향이 나지 않겠구나. 이제껏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잔디밭 위의 나도, 밤낮으로 해변가를 찾던 나도, 섬에 난 길을 더듬고 또 더듬던 나도 이젠 거기에 없다. 베갯잇에서 풍기던 아로마 향처럼 나는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그제야 이별이 실감났다. 이별이란 단어를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본 것만 같았다. 여독이 깊다. 아로마 향이 이 여독만큼이나 깊게 스며들었기를 바란다. 그들도 나를 앓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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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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