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국과 현실 그 사이. 창평 [여행]

우리의 매력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글 입력 2017.08.24 06:18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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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평 입구.jpg


창평, 하면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아니, 아마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그곳, 평창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괜찮다. 나도 처음에 그랬으니까. 내가 '창평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받았을 때, '겨울에 굉장히 춥겠군.. 단단히 옷을 챙겨야 겠어'라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창평은 전남에 있는, 주소를 쓸때 창평면 창평리에 소재한, 아주 작은 시골이다.


창평고.jpg
내 모교를 말해보자면, 대략 이런 곳이다.


철학과를 가겠다던 소녀가 경상대를 가고 의대를 가겠다던 소녀가 교대를 간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많은 시간이 흘렀더니 자유를 찾아 학교로부터 도망치던 소녀들을 학교 몰래 태우고 가던 정 많은 버스는 안내표에서 사라졌다. 인터넷에서는 '그 버스는 폐지 되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갈 수 있는 방법이 그 버스 밖에 없었고, 소녀들은 무작정 그 버스를 기다렸다. 창평은 그런 감성적인 곳이다. 이성적인 말들을 굽어버리는 곳. 이성이 거짓이 되는 곳. 안내표에서 사라진 버스가 버스 정류장에 들어 오는 것을 소녀들은 유령처럼 보고 있었다.


303 버스.jpg
 

이 버스 사라지지 않았어요? 하는 소녀의 물음에 버스 기사 아저씨는 무응답이었다.
유령처럼 버스 창문은 뿌옇다.
소녀들의 추억을 박제해둔 시골은 뿌연 창문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창문 속 시골.jpg


학교를 목숨걸고 뛰쳐 나와봤자 이런 곳들 뿐이다. 해봤자 국밥이나 곱창전골 뿐이다. 치킨집, 피자집도 하나씩밖에 없다. 다양한 먹을거리는 동네 빵집 뿐이다. 그런 게 좋았다. A급 인생을 강요받는 고등학교 시절, 얼굴에 도시 사람들이 잊어버린 무언가를 심지처럼 가지고 있는 시골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아도 좋아. C급이라도.' 라면서 포근히 안아주는 대자연의 굴레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든지 죽는 건 매한가지야, 라는 가벼운 말들을 자연은 걸어준다. 내 고등학교 시절 창평은 현실과 천국 사이에서,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했다.

막창전골 단골집이 나름 있다. 그 곳으로 갔다.


막창전골.jpg
 

이게 2인분이다. 4명이서 다 못먹었다. 원래는 날치알이랑 김 듬뿍 해서 육수에 볶아 주시는 볶음밥도 먹어야 했는데, 배불러서 못 먹었다. 아쉽다. 오동통한 막창을 육수에 끓이면 이 세상 모든 감칠맛이 난다. 고3 수능 끝나고 이후 못먹었다. 나름 고향의 맛이다.


창평 하늘.jpg


창평은 정말 이런 곳이다. 슬로 시티를 가서 그 마을에서 조금 더 벗어나 걸어다닌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볼 수 있다. 그 곳에서 해가 지고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근처에 그네랑 정자가 있었는데, 사라졌다고 들었다.


IMG_20141127_103335.jpg


맨 앞의 별볼일 없는 학교 안에는 이런 곳이 있다. 자습이 답답할 때 몰래 나와 벤치에 누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곤 했다. 선생님들이 지나가다 마주치면, '10분만 그러고 있어라'하고 지나가셨다. 착실해서, 그렇게 10분만 보다가 다시 자습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특히 나를 평가하기 위해 앞에 볼펜을 재깍이고 있는 면접관들은, 시골 학교 창평고인 줄만 알지,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모를 것이다. 한 친구가 벤치에 앉아 '이 나무에는 정령이 있어.'라는 바보같은 소리를 해도, 그저 흔들리는 나뭇잎만 편안하게 보고 있을 수 있는 곳이 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열 일곱, 열 여덟, 열 아홉을 창평에서 함께 지내면서, 여름의 우리는 들꽃같았다. 스무살의 우리는 길에 핀 들꽃을 꺾어 머리칼에 꽂았다. 우리들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취준생? 교대생? 재수생? 잘 모르겠다. 내 기억 속 여름의 우리는 이 글의 총체로도 모자르다. 이런 우리의 매력을 모르는 당신들은 불쌍하다. 우리의 기억은 종종 우리의 마음 속에서 따뜻하게 반짝거릴텐데.

그 시절 '우리'는 하늘이었고, 바람이었고, 나무였고, 비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문득 따뜻한 바람이 불면 기억날 것이다. 아 그 시절로부터 편지가 왔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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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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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Mr.castle
    • 십대였던 자신과 이십대인 자신이 만나 서로 추억을 주고 받는 것 같아서 좋네요.
      무언가는 사라지고, 무언가는 여전한 그 모호한 경계사이에서 담담히 창평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여행하신 것 같아요.
      글 속엔 직접 겪어서 묻어나는 경험에 대한 섬세함이 저로 하여금 그 곳을 상상하게 만들어요.
      왜 창평이 그저 과거의 장소가 아닌 다시 찾아와 회상하고 쓰다듬는 장소인지 알 것 같네요.
      그런 장소가, 재깍거리는 볼펜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에디터님의 소중한 추억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 부럽기까지 해요.
      산들거리는 들꽃에서 횐하게 핀 꽃이 되어 또다시 이십대만의 추억을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기사 정말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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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Mr.castle
    • 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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