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편집 : 배꼽 없는 것들의 세상 [문학]

글 입력 2017.08.26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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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은 매달 24일에만 기고됩니다.*



*****

 지은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군복의 사내를 기억했다. 광주 사투리를 쓰는 지은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사내가 돌연 지은의 치마를 들쳤던 것은 치마에 묻은 지은의 피 때문이었다. 지은은 사내의 침 삼키던 소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오빠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감았다. 지은의 작은 몸 위로 사내의 몸이 겹쳐지고 한참이나 지은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떨던 것을 끝으로 지은은 모든 것의 종말을 예감했다. 지은은 그곳에서 오빠와 지은 자신을 잃었다.

 풀벌레가 윙윙 울었다. 군화들이 오빠의 영정사진을, 오빠 친구들의 영정사진을 밟고 지나쳤다. 검은 테두리가 부서지고 오빠의 빛바랜 사진이 흙 묻은 군화에 의해 더럽혀졌다. 소녀 지은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차갑게 식은 엄마의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 봄바람은 불지 않았다. 밖에선 여전히 총소리와 비명과 피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하얗게 변해 버린 엄마의 품에서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입에서 흐르는 피가 지은의 눈으로 흘렀다.

 5.18은 지은에게 국가유공자라는 이름을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계엄군들은 총을 쏘던 자신들을 부정했다. 광주는 통곡했다. 자유의 대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광주를 잊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지은은 알았다. 군복을 입은 사내처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은과 광주는 서서히 잊힐 것을. 역사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그들을 기억해 줄 것을. 30년이 흘렀고 광주는 더 이상 기억되지 못했다. 지은은 오빠와 엄마의 영정 사진을 들고 사람들의 사이로 사라졌다. 그것이 30년 전의 이야기였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스크린에서 5.18민주항쟁 당시의 사진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장소는 명동. 많은 사람들이 중앙에 설치 된 스크린을 보고 지나쳤다. 사람들은 스크린을 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스크린을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한 명이 있었다. 흰 머리의 여성이 품에 사진 두 개를 안은 채로 멍하니 거리에 서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스크린에서는 계엄군과 시민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매를 맞고 있기도 했고, 연행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젊은 시절 지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 지은. 오빠와 걸어가던 지은의 뒷모습이 스크린에 나오고 있었다. 흰 머리의 지은은 천천히 스크린으로 다가갔다. 코앞에 다가서자 지은의 피 묻은 치마가 보였다. 지은은 공포보다는 그리움에 사로 잡혔다.

 -참 슬픈 일이죠.

 지은의 옆으로 젊은 태석이 섰다. 그는 스크린을 보는 지은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슬픈 일이라고. 지은이 태석을 쳐다봤다. 태석은 스크린에 고개를 박으며 말했다.

 -모두가 잊어요. 지나간 역사는 과거일 뿐이니까.

 지은은 태석을 따라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스크린에서 지은은 보이지 않았다. 지은은 30년 만에 자신의 상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잊은 게 아니야.

 탁한 지은의 음성이 울렸다. 태석은 지은을 바라봤다. 흰 머리의 지은은 사진 두 개를 태석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단절 된 거지.

 태석은 흑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중년의 여성과 젊은 남학생의 모습을 보았다. 아주 오래된 사진 같기도 했고 일부러 오래된 것처럼 보이려고 의도한 사진 같기도 했다.

 -시대가 끊어진 거야. 탯줄이 잘린 거지. 배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야.

 지은의 목소리는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태석의 시선이 사진에서 다시 지은의 얼굴로 올라왔을 때, 지은의 눈에서는 옅은 붉은 색의 눈물이 흘렀다. 지은은 그것을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지은은 등을 돌려 30년 전의 그날처럼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태석은 멍하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아니?

 리포터의 물음에 모자이크 된 고등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민주화운동으로 생긴 것 아니에요?

 -그럼 그게 언제 일인지도 아니?

 -글쎄요. 일제 이후?

 태석은 답하는 고등학생의 뒤로 사진 두 개를 품에 안고 지나가는 흰 머리의 여성을 보았다.

 -어차피 어른들은 이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하잖아요. 이런 거 꼭 알아야 해요?

 짜증스러운 답을 끝으로 방송은 끝을 알렸다. 태석은 마지막까지 카메라에 비춰지던 지은을 생각했다.

 단절된 것, 사라진 것. 태석은 문득 자신도 탯줄이 잘리고 배꼽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불안감의 사이로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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