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와 사랑받는 너는

나란한 층위의 끝과 끝을 움켜쥐고, 해가 지는 곳으로
글 입력 2017.09.1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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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와 사랑받는 너는
_ 나란한 층위의 끝과 끝을 움켜쥐고, 해가 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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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난 분명 어느 한 곳을 중심으로 삼고 빙글빙글 맴돌고있다 생각했다.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에 많았다.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죽은 사랑 이야기도 그 나름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러 사랑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내게 쌓였다. 때로는 감상적인 회한에 불과하거나 때로는 절절하고 뜨거웠다. 이야기들 저마다에게서 철학을 만나고 사상을 만나고 단순하게는 나의 사랑을 만났다. 보편 아닌 것에서 보편을 찾고 보편인 줄 알았던 것은 낯설어서 다시 깨닫고 동시에 실수했다. 그렇게 어디인지 몰라 어떤 확신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떠날 수도 없는 곳에서 빙글빙글 맴돌고 보면 어느 하루 밤엔 해가 지는 곳에 가 있었다. 눈을 뜨면 그 곳, 눈을 감으면 그 곳뿐이었다. 해가 지는 곳.
  
 
사랑으로 지탱되는 이 곳은 어디인가. 이 곳은 참혹하다. 가난, 질병. 강도와 밀수와 인신매매와 살인과 폭력과 종교의 범람. 살아있으므로 악하고 삶과 사람을 버리는 곳. 칼을 쥐고 살아야하는 곳.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 이 곳에서의 그들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곧 무너 내리지 않을까, 더 이상의 걸음을 잃지 않을까, 불안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들의 걸음 끝에 실린 어떤 무게를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더 두려웠다.
     
  
*
 
    
(하지만 도리와 미소는, 지나와 건지는.)
 
언니가 결혼을 하면 좋겠어.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혼자가 아니면 좋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미소는, 나의 작은 천사는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둘이 아니라 셋이면 좋겠어. 넷이면 더 좋고.
 
(…)
 
결혼을 하면 헤어지지 않을 수 있잖아.
결혼해도 헤어질 수 있어.
바보.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내 말은.
 
(…)
 
약속을 하라는 거야.
미소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계속 쏟아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겠다는 약속. 결혼할 때 그런 약속 하잖아.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는 미소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약속해도 헤어질 수 있어. 사람이란 원래 그래.
언니는 나빠.
미소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나쁜 말만 해서 날 힘들게 해.
 
(…)
 
그럼 나랑 결혼할래?
미소를 쫓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언니랑 결혼을 해.
미소는 진지했다.
우린 그런 게 필요 없지. 우린 약속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니까. 언니는 정말 멍청해.
미소의 얼굴에 화가 잔뜩 묻어 있어 계속 웃을 수는 없었다.
언니가 약속하고 내가 또 약속하면 우린 넷이 되는 거라고 헤어지지 않는 넷.
그래 알았어.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121~123쪽



넌 죽지마.
…….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같이 견뎌야 돼.
같이 어떻게.
우리가 함께 있으면 그럴 수 있어.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81쪽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기대고 손을 잡고 같이, 함께를 믿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며 죽지 않고 죽이지 않는다. 도리, 미소, 지나, 건지. 도리미소지나건지. 그들은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에서 이유를 찾고 삶을 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 차갑게 얼어버린 거대한 땅에서 한 쪽 끝과 저 쪽 끝으로 갈라져 있을지라도, 수많은 것이 죽었더라도.
 
 
*
 
 
 
그들의 사랑은 어떤 종류의 일일까. 그들의 사랑은 죽지 않는 일이다.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일 때,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일.
 
그들의 사랑은 나란히 단단하게 쌓여 올려진다. 그들의 삶과 외부의 경계를 짓고 그들의 상처가 더는 짓이겨지지 않도록 힘을 주어 다독인다. 세상의 양 끝에서조차 나란히 이어져있을 수평의 층위에서, 반드시 그 자리, 높고 낮음의 어긋남 없는 자리에서 방공호를 쌓아 올린다. 세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는 방공호.
 
 
 
(…) 둘은 서로의 상처에 대해 모르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있음을 인정한다. “서로를 지금 그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사랑이 쌓아 올려진다. (…) 소유와 정확히 등을 지고 있다. 소유, 때로 사랑을 가장하는 폭력이기도 한 그 안에서는 양쪽을 나-그것(대상)의 층위에 두지만 사랑 안에서라면 둘은 나-너라는 수평의 관계에 놓인다. 수평의 나와 너는 서로를 가지거나 상하게 할 리 없다.
 
전소영 평론,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모든 노래가 깨어나면」 중
(본 글에서는 문장의 순서를 뒤집어 배열했다.)
 
 
 
‘사랑한다’는 행위는 틀림없이 어떤 의미를 갖고있다. 이것은 한편에 독립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이 있고 다른 한편에 독립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며 그것에 충실하게 상응해서 대응했기 때문에 성취되었다는 식의 것은 아니다. ‘사랑받는 대상’은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지향적 정서 안에만 존립하는 것이며 그 곳 이외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중
 
 
 
사랑받는 대상, 그러니까 나와 수평의 층위를 공유하는 그 대상은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지향적 정서 안에서 존립된다.
 
 
 
나는 항상 지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지나와 눈이 마주치면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깊은 밤 몰래 지나의 말투를 따라 하고 지나의 웃음을 그려 보면서도 지나와 너무 가까워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57쪽
 
 
 
도리는 지나의 곁에서 항상 지나를 바라본다. 때때로 지나의 말투를 따라 하고 웃음을 그려 보며 지나를 향해 있다. 시선뿐만 아니라 도리가 유지하던 생각, 태도들마저 지나를 향한다. 도리의 ‘사랑하는 감정’은 반듯하게 떠올라 있는 줄 한 쪽 끝을 잡고 반대편 끝을 잡고 있는 지나를 바라보는 일과 같은 것. 잡아당기지도 않고 멀리 풀어버리지도 않으며 주어진 거리를 쥐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결코 한 쪽 끝을 놓지 않으며 사랑하는 감정을 존립해간다.
 
그들의 사랑은 이런 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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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나는 곳에 서면 어느 곳으로 가야할까.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어서는 안 되는지. 두 가지 물음이 교차하며 파도칠 때 내 손을 잡아 어딘가로 이끄는 네가 있을 것이다. 너는 같이 있으면, 함께하면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어디로 가야하는 질문에 해가 지는 곳으로 가자고 대답할 것이다. 해가 지는 곳, 그 곳은 끝없는 곳, 차갑고 광활한 곳. 그러나 우리는 확신 없이도 끝없이 기다릴 수 있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기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작가의 말에서





첨부된 그림은 피터도이그(Pter Doig)의 그림입니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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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Hoolo
    • 펜이에요!! 글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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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유인
    • 피터도이그 작품 너무 좋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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