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토록 게으른 시대극에는 설레지 않습니다만 : MBC < 왕은 사랑한다 >, KBS < 만나게 해, 주오 > [드라마]

로맨스 서사를 위한, 역사의 도구적 소비에 대하여
글 입력 2017.09.1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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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누각 위에 세워진 허구
 
드라마는 명백한 픽션이다. 도깨비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설정도, 무전기로 과거의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설정도, 대중은 드라마의 판타지로 용인하고 수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 스토리에 틈입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엄연히 문자로 남아있는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드라마의 소재가 될 때, 이는 단순한 허구에 그치지 않고, ‘재현’의 모양까지 띠게 된다. 물론 완벽한 재현일 순 없고, 완벽한 재현이길 기대도 않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적 배경이 이야기에 미치는 힘은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료를 참고해가면서, 그 시대에 있었던, 그리고 있을 법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특정한 역사적 배경이 재현되고, 그 속에서 인물은 욕망하고, 사건을 맞게 되고, 이야기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종종 허구가 범하는 실수 중 하나가 역사적 사실을 가벼운 소재로만 이용한다는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이용해서 허구를 만들면 안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중은 그 시대의 이야기를 만났을 때, 최소한 그 시대가 보여줄 수 있는 생활상, 아픔, 상황 위에서 허구가 움직이길 기대한다. 역사가 개인적 아픔의 소재로만 쓰이기보단, 개인적 아픔이 시대의 아픔으로 확장되어 어떠한 울림을 주길 기대한다. 시대극이 가지는 재현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역사라는 누각 위에 세워진 허구. 이때 허구가 사실을, 그것도 비극적 사실을 안일하고 게으르게 다룬다면, 대중은 이야기가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고개를 돌린다. 영화 <군함도>가 대표적인 일례인데, 대중이 기대했던 것은 그리고 제작사 발 보도 자료의 강조점은 ‘군함도 강제 노역의 재현’이었으나, 막상 탈출의 내러티브(허구)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역사를 둘러싼 상업주의가 많은 대중의 질타를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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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와 만주행 강제 동원, 로맨스를 위한 소비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MBC <왕은 사랑한다>(극본 송지나)와 KBS 드라마스페셜 <만나게 해, 주오>(극본 김은선)도 같은 맥락의 실수를 범한다. 특히나 두 드라마는 ‘속국 고려’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수난사를 로맨스 서사의 강조점으로 삼는다. 여성들이 원나라로, 만주로 강제로 차출되고 동원되어야 했던 비극적인 역사는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게 만드는 변곡점으로 기능할 뿐이다. <왕은 사랑한다>는 원나라 간섭기의 고려를 그리며, 원나라 출신 황후와 고려왕의 대립, 혼혈세자(충선왕)의 위기, 공녀 차출과 관련한 굵직한 사건들로 서사를 채운다. 특히 이 드라마의 극의 초반부터 중반까지의 분량은(무려 11회 정도) 공녀 차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채워지는데, 공녀 차출의 문제로 여자주인공 산은 정체를 숨기며 살아가고, 세 주인공은 산의 정체와 공녀 문제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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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캡쳐
  

그러나 장장 11회에 걸쳐 서사화 되었던 공녀 차출의 문제는 로맨스의 갈등이 해소되어야 할 서사적 필요에 의해 쉽게 해결된다. 정말, 너무나도, 쉽게. 심지어 해결 방식은 너무나 조악하다. 공녀 에피소드는 주인공들의 코믹스러운 기지(아픈 척을 한다던가, 코믹한 연기를 한다던가)와 고려 인삼이라는 공녀의 대체재로, ‘이번 귀국길에 데려갈 공녀는 없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11회에 걸친 갈등 요소가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는 것도 대단히 문제적이나, 이는 이야기 문법에서 다루어야 할 일이니 할 말은 많지만 차치하자.) 공녀 차출의 문제가 이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이번 귀국길이 없다면 다음에는 있다는 것인가? 산이 공녀로 끌려가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공녀의 문제는 끝이라는 건가? 공녀 문제는 단순히 세 사람의 로맨스를 위해 존재했던 에피소드인가? 찝찝함은 지울 수 없다.
 
KBS 드라마 스페셜 <만나게 해, 주오>도 마찬가지이다. (퓨전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고증은 심각한 수준이나, 여전히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만나게 해, 주오>는 일제강점기 경성에 ‘혼인정보회사’가 있다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근대와 근대 사이, 과도기적 연애사를 로맨틱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낸다. 이때, 갈등의 정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조선인 여성의 만주행 강제 동원이다. 일본인과 결혼하지 않은 조선인 여성을 전선에 동원시킨다는 외부적 갈등으로, 이를 인지한 남자주인공 주오는 여자주인공 숙자를 일본인 남성과 결혼시키려 하고, 이를 모르는 숙자는 만주행 기차에 오르려 한다. 그리고 기차의 행방과 목적을 뒤늦게 알게 된 숙자는 탈출하려 하고, 주오는 기차에 오른 숙자를 구하려 한다. 이 탈출 과정에서 주오와 주오 아버지의 갈등과 주오와 숙자 간의 갈등이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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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스페셜 <만나게 해, 주오> 캡쳐

  
돈을 갚으러 갔던 주오 아버지가 총독부 기밀문서를 보게 된다는 설정이나, 일본 순사들이 기차를 지키지 않은 채 모두 자리를 비운다는 설정이나, 말도 안 되는 설정은 즐비하지만 키치한 드라마의 분위기 상 어느 정도는 용인 가능하다. 그러나 주오에게 총을 겨누는 순사를 주오 아버지가 때려눕히고, 뒤이어 달려오는 순사들을 조선인 여성들이 해치우며, 총독부 국장은 쌍쌍파티에 참석해 망신을 당해서 결국 만주 강제 동원이 취소된다는 서사의 전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단지 ‘사랑하는 여자를 외부의 상황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보내야 하는 뚜쟁이’라는 주오의 캐릭터 설정을 위해 강제 동원을 이용한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강제 동원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은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이번 만주행 강제 동원이 취소되었으면, 숙자와 주오가 해피엔딩을 맞았으면 이대로 끝인가? 두 사람이 웃는다고 시청자 또한 웃고 넘어가야 할까? 미안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 게으른 상상력
 
마주보며 웃는 주인공의 얼굴을 보고도 찝찝한 심상이 남는 것은 서사 속 너무나 쉽게 해결된, 비극적 역사의 잔상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 공녀로 끌려가 노예처럼 살고,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오면 ‘환향녀’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일제강점기에는 전선으로 끌려가 학대 받으며 지금도 가해자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는 역사 속 피해자로서의 여성들. 드라마가 그리는 이들의 아픔은 로맨스 서사의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해결 방식 또한 너무도 조악하고 우스운 수준이어서, 대중에게 해소의 ‘판타지’도 되지 못한다. 사건의 해결 이후는 평화와 안도로 가득한 세상이다. 대중의 찝찝함은 그 이면으로 밀려나고 지워진, 실제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에서 기인한다. 공녀로 차출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남은 산이보다, 사랑하는 주오와 마주보고 웃는 숙희보다, 지워지고 뱉어진, 이름 모를 얼굴들을 향한 대중의 상상력이 드라마의 상상력을 압도해버린다.
 
분명 드라마는 픽션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의 서사화를 향한 이토록 게으른 접근은 오히려 강조하고 싶어 했던 로맨스 서사에 대한 천 년의 설렘도 식게 만든다. 이 게으른 역사화 방식에 대중은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적어도 개인에게 시대적 아픔을 부여했다면, 이 개인의 아픔은 다시 시대적 아픔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완벽한 재현은 불가할지라도, 소재로 끌고 왔다면 적어도 그 군상들의 아픔에 대해 고민했어야 하지 않는가? 주인공 한 사람이 시대적 아픔을 극복했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꽃길은 주인공들만 걸을 뿐,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은 차마 웃지 못한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상상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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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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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
    • 안녕하세요, 에디터 11기 염승희입니다! 평소에 어렴풋이만 문제로 인식해 왔던 주제였는데, 이렇데 나윤님께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글을 읽으니, 이에 대해 특별히 진지해 본 적이 없던 저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나윤님의 분노가 한 줄 한 줄에서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에 공감합니다. 적어도 시대물이라면, 그 시대를 빌려서 작품을 진행한다면, 멀쩡하고 자명한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거나 단순화시키는 것은 정말인지 그릇된 것이죠. 나윤님의 글을 읽음으로써 저역시 앞으로 접하게 될 역사극은 좀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습니다. 소중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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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깥
    • 2017.11.04 22: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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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분노가 한 줄 한 줄 느껴졌다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 의도와 감정이 잘 전달된 것 같아서 정말 기쁘네요!

      많이 부족한 글인데 승희님한테 의미있는 글이 된 것 같아서 기쁩니다.
      긴 글 읽어주시고 정성스러운 코멘트까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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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색구름
    • 안녕하세요. 이번 두레 10차에 참여 중인 문화리뷰단 고혜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드라마작가, 관련 직종을 제 진로방향으로 잡고 있는 학생으로서 나윤님의 글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제가 보면서 아쉬워하던 부분이 어떤 것임을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었고 이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사극/시대극이라 함은 그 사건이 벌어지는 시대의 상황을 좀더 두드러지게 다루는 것으로, 드라마를 통해 전달하는 메세지의 묵직함이 더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흐름 상 편리성으로 역사를 조금은 가볍게 다루는 것은 문제가 될 것입니다. 관련 분야로 갈 학생으로서 배워가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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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깥
    • 2017.11.04 22: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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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색구름앗, 드라마 관련 직종을 희망하신다니, 이 글로 두레를 신청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그저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드라마를 향유하는 한 사람으로서 글을 쓴 건데,
      관련 직종을 희망하시는 혜원님에게 제 글이 읽히다니,
      저는 한 사람의 향유자로서 의미있는 피드백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한 사람의 필자로서,  혜원님의 코멘트로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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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
    • 안녕하세요 두레 참가 중인 김소원입니다. 구성과 가독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구성은 무척 잘 되어있는 것 같아요! 각 문단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고 처음에 문제제기를 한 후 구체적인 예를 들고 마지막 결론으로 끝나서 안정적이었습니다. 가독성 부분도 대체로 잘 읽혔습니다. 다만 글 자체가 강하게 주장하는 글이다보니 명사가 반복되면서 조금 어렵고 딱딱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특히나 두 드라마는 ‘속국 고려’와 ‘식민지 조선’의 여성 수난사를 로맨스 서사의 강조점으로 삼는다.' 에서 '로맨스 서사의 강조점'같은 부분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그 외에 전체적인 내용은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감'게으른 상상력'이라는 표현도 공감이 되었고 저도 역사드라마를 보며 갸우뚱 할 때가 많았는데 왜 그런지 설명을 하려면 막막할 때가 많았는데 나윤 님의 글을 읽으며 그 설명되지 않던 지점이 조금 명확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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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깥
    • 2017.11.04 22: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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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매나무읽어주시고 정성스러운 피드백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원님 코멘트를 읽고, 해당 문장을 다시 소리내어 읽으니 말씀해주신대로 다소 딱딱하고 입에 걸리듯이 읽히네요! 조언해주신대로 좀 더 유려하게, 잘 읽히게 문장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설명되지 않던 지점이 명확해졌다니, 부족한 글임에도 의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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