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2.0] 통쾌함과 불폄함 사이_엽기적인 그녀

글 입력 2017.09.3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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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엽기적인 그녀>(2001)를 이제서야 보았다. ‘엽기’라는 과거의 신조어가 주는 빛이 바랜 느낌 때문인지 마음이 가질 않았다. 수많은 매체에서 보여주는 지나치게 많은 자료화면들과 패러디들로 영화에 대해 다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안다고 믿었다. 이 영화는 전지현과 차태현, 두 사람의 청춘이지, 나의 청춘이야기는 아니니까. 과거에 대해 이토록 거만할 수 있었던 건 아마 여전히 스스로가 청춘이라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어쨋든그렇게 존재만 알고 있던 이 영화가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기 시작하자 느닷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말이지, 가끔은 모든 만남과 모든 사건들이 갑작스럽다. <엽기적인 그녀>를 보게 된 것도 그렇고, <엽기적인 그녀>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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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알고 있듯이 여기서 ‘엽기적인 그녀’란 전지현을 말한다. 늘씬한 몸매에 가느다랗고 하얀 손목으로 검고 긴 생머리를 넘기는 여성. 영화가 만들어진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실루엣의 여성은 전지현으로 채색된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나름 최근의 작품들(<암살>이나 <별에서 온 그대>) 에서 보여지는 당차고, 씩씩하고, 멋진 여성의 모습을 한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로부터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당황스러울 만큼 ‘엽기적’이라는 것이 이 영화에서만 유독 도드라지는 점이랄까.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견우74'라는 닉네임의 한 남자(영화 속 견우, 차태현)가 ‘나온누리’라는 포털사이트의 유머란에 올렸던 자신의 연애담을 영화화 한 것이다. 원문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그가 밝힌 두 사람의 첫만남부터가 만만치않게 엽기적이다.



  그녀와 저는 같은 문으로
함께 인천행 지하철을 타게 되씀미다.
취해서 비틀거리지만 안는다면
정말 매력저기고 갠차는 아가씨여쪄... 푸하하핫!
진짜 특이하다! 

저는 그녀가 술에 취해서
배를 기대고 서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힐끔거리며 그녀를 계속 지켜보아씀미다. 

그런데 몸을 미세하게 부르르 떨던 그녀가
왠지 불안해 보이더니만
마침내 우웨에엑~~~ 우웨엑~~
좌르르르르~~~ 네, 그러씀미다!

그녀가 앞에 앉아 이떤 대머리 아저씨 머리 위에
순식간에 일을 친 거시여씀미다!!
순간 지하철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절라 재미는 상황이었져.

진짜 일은 거기서부터 터지고야 말아씀미다. 
오바이트를 시원하게 하던 그녀가
게슴치레한 눈빛으로 저를 보며 이러는 검미다!
 자기야!~ 어어억~ 우욱~ 자기~ 웩~! 

- 엽기적인 그녀 원문 中 -



 영화에서는 그녀가 토하는 장면을 하도 상세하게 보여줘서 나까지 구역질이 날 뻔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느닷없이 안 나오면 죽는다고 불러내지를 않나, 물에 빠뜨리지를 않나. 교수님한테 자기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견우가 아빠라면서 강의실에서 견우를 빼내온 장면은 이미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를 엽기적이라고 표현하게 된 동기는 단순히 엉뚱하고 이상한 행동들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녀는 말그대로 '신여성'이었던 것이다.





통쾌하다!      

“야, 너 얼른 안일어나? 노인네한테 자리 양보해야지”
“야, 니들 지금 원조교제 하는 거지? 내가 지금 너네 술먹는거 때문에 이러는거 같애? 민증 내놔봐! 아저씬 딸도 없어요? ”
“아저씨, 담배꽁초를 여기다 버리면 어떻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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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우는 영화 초반부에 밝혔던 것처럼 딸을 원했던 부모님에 의해 ‘여자아이’처럼 자랐다. 이와는 정반대로 견우의 그녀는 사내 대장부가 따로 없다. 할아버지가 앞에 서 계신데도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남학생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하는 것도, 술집에서 원조교제를 목격하고 중년 남성들에게 다가가 화를 내고 여학생들에게 충고를 하는 것도 그녀다. 그녀의 그런 행동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면 자동반사적으로 움직인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지금만큼은 공론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정의로움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미디어 속에서 담배를 펴고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학생들을 처벌하는 것도, 우연히 목격한 소매치기를 뒤쫓아가는 것도 주로 남자였다. 그랬던 시대에 <엽기적인 그녀>는 지극히 ‘여성스럽다고’ 할 수 있었던 여성에게 파란색이나 로봇만큼이나 ‘남자다움’으로 일컬어지는 옷을 입혀놓은 것이다. 영화에서 차태현은 분홍색 니트를, 전지현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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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줍은 것. 소심한 것. 조용한 것. 배시시 웃는 것. 애교부리는 것과 같은 속성들을 여성에게 부과하려는 관습적인 분위기는 오늘날 많은 부분 희석되긴 했다. 하지만 여성이 먼저 고백하는 것이라든가 스킨십이나 선물을 요구하는 것, 혹은 먼저 연락하거나 데이트신청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남성보다 먼저 상대에게 다가서는 일은 지금도 ‘여자니까~’라는 표현과 함께 금기시되는 경우가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이러한 자기 검열은 사회의 은근한 분위기에 의해 여성 내부에서 자의식 적으로 일어나곤 하며, 당시엔 더욱 심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한다.


너 우리 100일 기념일 잊지 않고 있지?
넌 여자가 어떨 때 제일 이쁘니?
무슨 곡 제일 좋아하는데?
야 너 나한텐 안물어봐?
난 장미꽃 한 송이만 주면 돼. 그리고 너 고삐리 때 교복 있지?
100일 기념일 날 고삐리 교복 준비하고 장미는 나 수업시간에 강의실로 갖고와. 알았지? 니가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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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그녀는 하늘하늘한 가디건에 얇은 원피스차림, 그리고 하얀색 뾰족구두를 신고 견우네 학교를 찾는다. 하지만 뾰족구두가 발이 얼마나 아프던가. 신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심지어 난 뾰족구두를 신고 걷지도 못한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발이 아프다며 견우에게 신발을 바꿔 신자고 한다. 그러자 견우는 남자가 어떻게 그런 걸 신느냐며 거절한다.

 물론 이해한다. 남자 중에 뾰족구두를 신는 사람은 지금도 찾아보기 힘들며, 그런 걸 평생 신어본 적이 없는데 어찌 선뜻 알겠다고 답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녀는 늘 그랬듯이 끝끝내 견우에게 뾰족구두를 신기고 만다. 그러고는 ‘나 잡아봐라’를 하자는 것이다. 안 잡으면? 죽는다! 어처구니없는 부탁도 척척 들어주는 견우가 절뚝거리며 그녀를 잡겠다며 뛰는 모습은 귀엽고 또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뭇여성들은 이 장면에서 일종의 통쾌함을 느꼈으리라 확신한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뾰족구두가 ‘필연적으로’ 상징할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속박, 그리고 억압을 그녀가 재치 있게 해소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신발을 바꾸어 신은 지 15년도 더 흘렀지만, 과연 남성들은 뾰족구두의 아픔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얼마만큼 그 아픔으로부터 탈피했는가?





     하지만, 불쾌하다. 


 이렇듯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장면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선에서 이 영화는 불편한 점이 몇 군데 있다. 그녀는 켜켜이 묵은 관습을 후련하게 벗어던지는 동시에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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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자잖아~”
“넌 남자가 왜이렇게 쪼잔하냐?"
“난 여자니까~”


 언젠가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 <신사의 품격> 진짜 재밌었는데 지금은 못 봐주겠더라. 너무 남자위주인 거 같아.’ 드라마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길 듣자 <또! 오해영>에서 꽤나 유명했던 키스신 한 장면이 떠올랐다. 골목길에서 남녀주인공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다 남자가 갑자기 여자의 두 팔목을 잡고 벽에 밀치는 것이다. 그러고는 키스. 드라마 맥락상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장면이 ‘아름답다’고, ‘남자답다’고 칭찬받는 것이 조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여성이 ‘제압’당하는 듯한 포즈라는 이유로 나는 거부반응이 일어나버렸는데, 누군가에겐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던 것이다. 비록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2000년대 여성들에게 워너비로 자리매김했었다고는 하지만 ‘시류’라고 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지금 시대가 최소한 여자와 남자에 대해 사회가 울타리 지어놓은 스테레오타입과 그로부터 발생한 워딩들을 불편해 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편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성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소수자들에 대한 수많은 종류의 비하와 혐오가 존재해왔고, 이들은 여전히 유머와 개그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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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지하철에 앉아있다. 아이 하나가 립스틱으로 바닥에 가로로 줄 하나를 긋는 것을 보고, 그들은 사람들이 오른발로 선을 지나가면 전지현이, 왼발로 선을 지나가면 차태현이 맞기로 내기를 한다. 몇 명의 사람들이 차례로 지나가고 차태현이 따귀를 다섯 대 쯤 맞았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행렬의 마지막인 한 남자에게로 쏠린다. 요즘도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와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과 그 남자는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특징은 오른쪽 발을 잃은 장애인이라는 것. 영화는 그가 ‘왼발’로 두 사람을 향해 콩,콩 하고 걸어오는 장면을 몇 초가량 보여준다. 그 이유는 아마도 견우가 그녀에게 또 한 번의 따귀를 맞을 것임을 암시하는 ‘재치’있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 장애인 분에게는 미안할지라도 웃음이 나올 수도 있고, 견우 입장에서는 '왜 하필 지금 저런 장애인이 지나가나ㅡ'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나조차도 배시시 웃어버렸다.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탓하거나 그걸 보고 이미 웃어버린 수많은 관객들에게 죄의식을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고 내겐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것들로 웃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세상엔 그 누구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 다함께 미소 지을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앞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시선, 그리고 여성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과거에 비해 훨씬 발전한 것처럼, 비하 당함과 동시에 소비되는 소수자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한다. 왜 그렇게까지 불편해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그로 인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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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실화면 어떻고 픽션이면 어떠한가. 우연이면 어떻고 운명이면 어떠한가. 누군가의 행복했던 기억과 유리알처럼 진솔했던 사랑을 그저 묵묵히 지켜봤다는 이유만으로도 창틀을 넘실거리는 가을 햇살처럼 충만해지는 것을. 하물며 '엽기적인 그녀'와의 연애담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두 사람의 이야기엔 그저 사랑뿐만이 아니라 통쾌함, 그리고 한편으로의 불편함까지도 함뿍 묻어나지 않았던가. 견우와 그녀 사이에, 그리고 그들과 나 사이에 오고간 감정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오랜만에 마음이 팽팽하리만치 꽉 들어찬다.





보암보암 : 이모저모 살펴보아 짐작할 수 있는 겉모양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

감정과 느낌의 응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예술로부터
감정과 느낌이 가진 모습들을 평범하게, 동시에 독특하게 풀어내어
보암보암이란 이름처럼 따듯하고 몽글몽글한 글을 써보려 합니다.

보암보암 2.0을 시작합니다.
같은 말도 상황과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곤 합니다.
<보암보암2.0>은 대사, 혹은 가사를 중심으로 
거기에서 드러나는 감정과 느낌을 보암보암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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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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