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함께 허무는 사랑의 세계

_ 다시 사랑의 세계를 구축하며, Amour!
글 입력 2017.10.02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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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허무는 사랑의 세계
_ 다시 사랑의 세계를 구축하며, Amour!
 

 
(영화 아무르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는 글입니다.)


 
이제 곧 당신은 여든 두 살이 되겠구려. 당신의 키는 6센티미터쯤 줄어들었고 몸무게도 겨우 45킬로그램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고 우아하며 탐스럽구려. 우리가 함께 산 지 58년이 되어가고, 나는 당신을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하고. 오로지 내게 안긴 당신 몸의 열기로만 가득 채워질 탐욕스러운 공허를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에 새로이 간직하오.
 
_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낼 편지. 어떤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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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둘은 둘의 무대를 세운다. 둘이 만든 하나의 세계. 둘이 존재하고 실현하고 반응하지만 동일한 하나의 세계. 이 세계는 둘이라고 해독되는 유일한 세계, 패러독스. 이 세계는 다시 선언함으로써, 어떤 지점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끊임없이 발명되고, 영원을 약속한다. 너와 나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심지어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다 하더라도 나는 결국 나로서, 너는 너로서 무언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나는 너를 빤히 쳐다볼 수 있고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너를 사로잡은 무언가를 아는 일, 네가 어떤 상태에 속하였는지 알아차리는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린 우리 둘의 차이 속에서 발발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나와 너의 차이 속에서만 생길 수 있는 우리의 세계.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과 동일하지만 차이가 된다는 패러독스에서 너와 나는 세계를 구축한다.
  
 
산에 오라 사랑하는 여인의 어깨에 기댄 채, 황금빛 초원, 나무 그늘, 울타리 뒤에서 미동도 않는 검은 코 양 떼들, 바위 뒤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태양 등 저녁 무렵의 평화를 보는 자는 바로 나이며, 그녀의 얼굴을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저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다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동일성이 세계에 속한다는 것, 사랑은 바로 이 순간 동일한 하나의 차이가 된다는 패러독스를 저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와 나는 이러한 유일한 주체, 즉 사랑의 주체로 체화되며, 사랑의 주체는 우리 양자의 차이의 프리즘을 거쳐 세상에 전개 됩니다. …….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탄생을 목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_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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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명 이 세계를 재발명하고 우연과 우연을 고정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여러 형태들을 거쳐 천천히, 혹은 성급하게,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가령 나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사랑의 세계가 무너졌다는 것이 더 이상의 사랑이 없거나 이전의 사랑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구축했던 세계가 이제는 재구축되어야한다는 것,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가 무너지는 조짐이 보일 때 우린 부정하거나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혹은 상황을 외면하며 결말을 유보시키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이 세계는 빠르게 부서지고 발 디딘 곳이 흔들려온다면 우린 결말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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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mour는 노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은 빠른 속도로 여자의 삶을 잠식해 나간다. 죽음과 가까워지며 그녀가 지키던 품위를 잃고, 무언가를 유지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태만이 지속된다. 그런 그녀와 함께하는 남자는 둘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무섭고 아득한 악몽이 어쩌면 악몽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악몽. 여자는 곧 죽을 것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 더 이상 그들이 구축해 온 세계를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시간 속에 끌어들일 수 없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이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다. 남자는 삶을 잃어가는 여자에게서 완전히 삶을 앗아버리고, 둘의 무대는 나란히 채워졌던 때처럼 나란히 함께 텅 비워진다.
 
둘이 등장하는 무대는 아마, 이 곳에서의 더 이상의 재연은 없을 것. 그 둘은 오직 둘이 함께인 상태에서 다음 무대를 새로 지으러 갈 것이다. 텅 빈 무대는 이전에 수없이 재연되었던 것들이 묻어 있는 채로, 이전의 것에서 탄생되었던 것들로 채워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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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ur, 그 둘의 사랑.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집을 나서면, 곧 그들의 발검을 뒤로 세계는 무너진다. 함께 구축했고 함께 허무는 사랑의 세계.


사진은 영화 속 장면입니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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