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로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일
글 입력 2017.10.16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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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
_사랑하는 일


영화 <시인의 사랑>
감독 김양희
출연 양익준, 전혜진, 정가람


13.jpg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제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_ 김소연, 그래서 『수학자의 아침』


*
<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이 읽는 시입니다.
 


영화 <시인의 사랑>. 제목을 읽고 보니 ‘누구의 사랑’, ‘누구의 사랑’들이 여럿 떠올랐다. ‘누구’는 내 이름으로 채워지다가, 너의 이름으로 채워지다가, 알랭 드 보통의 책 속 스물다섯 살 남자로 채워지다가, 어느 새 보면 나로만 채워지기도 했다. ‘누구’의 사랑 속 그 ‘누구’가 이렇게나 여럿인데 뭐, 하고 김소연의 시 「그래서」도 여럿의 이름으로 읽었다. 여럿의 이름은 덧없도록 꼭 나에게로 돌아와서 결국에는 나의 사랑으로 기울었지만.
 
‘누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사랑이 차곡차곡 분류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도 제목은 ‘시인의’ 사랑이라고 해 놓고는 누구에게나 꼭 한번은 찾아올 사랑이라고 홍보하는 거 보면 누구 혼자 가진 사랑은 없나 보다.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초월이 아니라 내재하는 성질 때문에. 그냥 잠깐 시인이나 시인의 아내나, 시인이 사랑한 소년에게 꼭 맞는 일련의 카테고리에 걸려있다가는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분류되거나 어쩌면 합쳐지는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사랑에도 종류가 있겠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닮았는데, 다만 그들 모두 서로를 통해 기쁨을 알았다 해도 그게 꼭 서로 같은 때에 마주앉아 하는 일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랑 슬픔이 언제나 같이 다닌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나와 사랑하는 너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사랑할 따름이어서 여전히 슬프다는 걸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알아버렸을 거다. 절대적인 차이를 우린 사랑에서 보아야 할 테니까.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중 인용) 나와 너의 다른 지점들. 내가 여기서 잘 지내요, 하는 소리는 나만 듣고 네가 잘 지내니, 물어 봐야 사랑 말고 슬픔 먼저 깨어날 게 뻔해서 안부를 묻는 괜한 짓은 차라리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너는 그 곳, 나는 이 곳에 서로 다르게 있을 테다.
 


 
둘이 등장하는 무대,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 나가는 것.
 
_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너와 내가 서 있는 이 지점들 곁으로 둥글게 우리가 함께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을까. 너 없는 내일이라면 저 멀리서 오지 않는 편이 낫지만, 내일은 내일이면 올 것이다. 만약 내일이 올 때쯤이면 너랑 내가 서로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더 이상 죄 짓는 마음도 아니고 죽음도 연민도 아닌 마음으로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공들여 세운 것은 붕괴하고, 죽음이 다가오고,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듣는다 해도, 그렇다 해도 우리 사랑의 지점에서 온갖 고독을 넘어서 주어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을 하려는 것. 그게 ‘누구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사랑. 우리가 하는 일이다.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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