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로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
사랑하는 일
글 입력 2017.10.16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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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하나의 세계에서_사랑하는 일영화 <시인의 사랑>감독 김양희출연 양익준, 전혜진, 정가람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꿈속에선 자꾸 어린 제가 죄를 짓는답니다.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나 혼자 들어요._ 김소연, 그래서 『수학자의 아침』*<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이 읽는 시입니다.영화 <시인의 사랑>. 제목을 읽고 보니 ‘누구의 사랑’, ‘누구의 사랑’들이 여럿 떠올랐다. ‘누구’는 내 이름으로 채워지다가, 너의 이름으로 채워지다가, 알랭 드 보통의 책 속 스물다섯 살 남자로 채워지다가, 어느 새 보면 나로만 채워지기도 했다. ‘누구’의 사랑 속 그 ‘누구’가 이렇게나 여럿인데 뭐, 하고 김소연의 시 「그래서」도 여럿의 이름으로 읽었다. 여럿의 이름은 덧없도록 꼭 나에게로 돌아와서 결국에는 나의 사랑으로 기울었지만.‘누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의 사랑이 차곡차곡 분류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영화 <시인의 사랑>도 제목은 ‘시인의’ 사랑이라고 해 놓고는 누구에게나 꼭 한번은 찾아올 사랑이라고 홍보하는 거 보면 누구 혼자 가진 사랑은 없나 보다.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초월이 아니라 내재하는 성질 때문에. 그냥 잠깐 시인이나 시인의 아내나, 시인이 사랑한 소년에게 꼭 맞는 일련의 카테고리에 걸려있다가는 다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분류되거나 어쩌면 합쳐지는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사랑에도 종류가 있겠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닮았는데, 다만 그들 모두 서로를 통해 기쁨을 알았다 해도 그게 꼭 서로 같은 때에 마주앉아 하는 일이 아니었을 뿐이다.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랑 슬픔이 언제나 같이 다닌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나와 사랑하는 너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사랑할 따름이어서 여전히 슬프다는 걸 우리가 선 그 자리에서 알아버렸을 거다. 절대적인 차이를 우린 사랑에서 보아야 할 테니까.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중 인용) 나와 너의 다른 지점들. 내가 여기서 잘 지내요, 하는 소리는 나만 듣고 네가 잘 지내니, 물어 봐야 사랑 말고 슬픔 먼저 깨어날 게 뻔해서 안부를 묻는 괜한 짓은 차라리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전히 너는 그 곳, 나는 이 곳에 서로 다르게 있을 테다.둘이 등장하는 무대,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 나가는 것._ 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너와 내가 서 있는 이 지점들 곁으로 둥글게 우리가 함께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을까. 너 없는 내일이라면 저 멀리서 오지 않는 편이 낫지만, 내일은 내일이면 올 것이다. 만약 내일이 올 때쯤이면 너랑 내가 서로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더 이상 죄 짓는 마음도 아니고 죽음도 연민도 아닌 마음으로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을까.공들여 세운 것은 붕괴하고, 죽음이 다가오고,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듣는다 해도, 그렇다 해도 우리 사랑의 지점에서 온갖 고독을 넘어서 주어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을 하려는 것. 그게 ‘누구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사랑. 우리가 하는 일이다.[양나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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