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 #위험했던 순간 #우편물 #샤워 #물웅덩이

2017.10.20 9.
글 입력 2017.10.2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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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위험했던 순간


9살 어린 남동생이 아직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에요.
배가 부른 엄마는 소파에서 잠시간의 낮잠에 빠져있고,
저는 따뜻한 방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어요.

엊그제인가 TV에서 본
원시 부족들이 사냥을 할 때 쓰는 긴 관 모양의 도구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관 속에 작은 돌을 넣어 후! 불면 반대쪽으로 돌이 날아가 사냥감을 맞추는 원리였지요.

큰 종이를 얇게 돌돌 말아 관을 완성한 후
돌을 대신하여 관 속에 넣을 물건을 고민했어요.

고민도 잠시, 좋은 재료가 생각이 났어요.
바로 호일이었답니다.

부엌으로 콩콩 달려가
서랍에 있는 호일을 꺼내 조금 뜯어서
동그랗게 꾸기니 관에 딱 맞는 공이 완성되었어요.

야심 차게 공을 관 끝에 넣고 한쪽 끝에 입을 대고 후! 부는데
그만 공이 관에 껴버리고 말았고
후! 후! 불어도 나오지 않자 방법을 바꾸어 쏙! 빨아들이는 순간,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어요.

작은 호일 공이 작은 기도에 걸려버린 거에요.
아주 찰나의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뭐지?
죽는 건가?
죽기는 싫은데.
엄마를 깨워야 하나?
하지만 뱃속에 있는 아가와 엄마가 놀라면 어쩌지?
그냥 포기해야 하나?

짧디 짧은 인생도 눈 앞에 지나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 인생의 필름 끝에 번쩍 든 생각은
역시 ‘죽고 싶지 않다.’ 였던 것 같아요.

그 생각과 동시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와 막히는 숨에도
최대한 침착하게 엄마를 흔들어 깨웠어요.

엄마를 놀라지 않게 하고 싶었지만
목에 뭔가가 걸렸다고 손짓하는 저의 모습에 깜짝 놀란 엄마는
얼른 하임리히법으로 나쁜 호일 공을 기도에서 빼주셨어요.
그 작은 물체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해요.

여러 모로 놀란 경험이었지만,
죽을 뻔했다는 것보단 그 짧은 순간에
포기할까 생각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살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스스로가 더 놀라웠어요.

잘했죠?





#38 우편물


그 동안의 유년의 기억 에피소드를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어린 저는 사고뭉치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하루는 같은 동에 사는 사고뭉치 친구가
엄마들이 수다를 떠느라 한눈을 판 사이에
작은 일탈을 제안해왔어요.

아파트 동들의 입구마다 꽂혀있는 편지들을,
즉 우편물들을 사람들이 가져가기 편하도록
전부 빼놓자는 거였어요.

잠시 고민했지만
꽤나 합리적인 일탈이었기에
얼른 엄마들의 눈을 피해 손을 잡고 달아났어요.

그리고는 신나게 아파트마다 돌면서
열심히 우편물들을 빼서 바닥에 던져놓았지요.

비록 높은 층수의 집에게는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아
편의를 제공해주지 못했지만,
아주 열심히 우편물을 빼버렸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아이들이 사라져 깜짝 놀란 엄마들은
이내 아파트 동마다 바닥에 떨어진 우편물들을 따라
우리를 찾아냈어요.

혼나지는 않았어요.
너무나 해맑게 편지들을 빼놓았다고 의기양양했으니 말이에요.
결국 다시 빼놓은 편지들을 모조리 꽂아놔야 했으니 말이에요.





#39 샤워

분명 사고뭉치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하였지만,
이번 에피소드도 엉뚱한 짓을 한 이야기에요.

큰 이모네에 있을 때의 일이었어요.
이제 스스로 샤워를 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
외출 후 이모께서는 언니와 저에게 작은 미션을 주셨어요.

이모의 도움 없이 둘이 알아서 깨끗이 샤워하고 나오기.

‘충분히 할 수 있어요!’를 외치며 욕실에 들어간
둘은 곧 작은 딜레마에 빠졌답니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린스로 머리를 감고
폼클렌징으로 얼굴을 닦고
바디워시로 몸을 닦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
너무나 불필요하게 느껴졌어요.

이제 스스로 씻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복잡한 순서를 거치지 않고 샤워를 간단하게 끝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는 2살 어린 저는 2살 많은 언니에게
4가지의 과정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법이 무엇인지 자문을 구했어요.

잠시 고민을 하던 언니의 해답.
‘한 번에 다 섞어서 씻으면 될 거야!’

세상에, 2살 어린 아이는 언니의 그 말을 듣고
역시 언니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쩜 그리 멋진 생각을 했을까요?

그렇게 해서 둘은 작은 고사리 손에
샴푸와 린스와 폼클렌징과 바디워시를 모두 섞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었어요.
간단하게 끝마쳐야 한다는 원칙하에
물도 몇 번만 끼얹고 개운해하면서 나왔답니다.

뿌듯하게 샤워를 끝내고 나온
둘의 머리를 번갈아 가며 말려주시던 이모는 이내 의문을 품으셨어요.
머리를 수건으로 비빌 수록 점점 거품이 솟아났기 때문이에요.
또 그 거품은 바디워시의 색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샤워를 한 것이냐는 물음에
저와 언니는 당당하게 새로운 샤워 방법을 알려드렸어요.
경악을 하셨던 이모의 표정이 생생해요.

순서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잔소리와 함께 결국 샤워를 다시 하고 말았지요.
그날 우리는 잠이 들기 전까지 보통의 샤워 방법을 외워야만 했어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 밤이었어요.





#40 물웅덩이

비가 온 뒤 생기는 물웅덩이에서
첨벙거리며 노는 것도 참 좋아했지만,
거울처럼 나와 하늘과 세상을 비추는
 물웅덩이 속 세상을 상상하는 것도 참 좋아했어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하루 지나면 말라버릴 물일 뿐이지만,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지만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창일 뿐이지만
그래도 상상은 언제나 즐거웠어요.

물웅덩이 속 세상은
비가 오지 않을까요?
그 속에서도 저는 그대로 저일까요?

모래가 젖어 생긴 웅덩이 속과
시멘트 바닥에 생긴 웅덩이 속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일지도 궁금했어요.

평범한 아이로서의 일상을 탈피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통로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잔잔한 물웅덩이에 발을 살짝 넣어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물결만 생길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면 그냥 에이 아쉽네 하고
다음 기회를 기대하며 첨벙거리고 놀면 되었어요.

기회는 언제나 있으니까요.
사실은 지금도 기대하고 있는걸요.





전문필진 명함.jpg
 

[정연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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