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바다를 건너다.

-소설 '배를 엮다'를 읽고.
글 입력 2017.10.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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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바다를 건너다

벽돌만큼 무겁고 두꺼운 종이사전을 아직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게 있어서 사전이란 중학생 시절 국어시간에 어떻게 단어를 찾는지 배웠던 순간 이후로 단 한번도 펴보지 않은, 그저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애물단지 일 뿐이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누군가와 서로 통하기 위해서 모든 말이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배를 엮다‘는 모든 말을 정확하게 담아내고자 사전 <대도해> 제작에 일생을 거는 사람들의 삶과 열정을 그대로 담아낸 책이다.

우선 이 책에는 작가가 가진 사전과 말에 대한 생각이 여과 없이 담겨있다. 사전의 제목 ‘대도해’는 거대한 말의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편집자 아라키는 입사한 마지메에게 대도해의 의미를 설명해줄 때 이렇게 말을 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이 말처럼 말과 사전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문장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거대한 말의 더미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속에서 필요한 작은 덩어리들을 꺼내어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덩어리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바로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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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수시로 메모를 하는 모습과 비슷한 단어의 의미를 정의내리는 등의 내용을 보며 그동안 무심코 넘겨왔던 말이 누군가에게는 저렇게 다가온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여러 가지 대화와 주인공들이 들었던 예시들이 기억에 남았는데 특히 기시베와 마지메가 나누는 ‘사랑[愛]’ 에 관한 대화 중 - 기시베의 “고양이와 성교는 하지 않잖아요!”-라는 말을 보며 다양한 사랑의 종류를 명쾌하게 분류하는 부분에서 감탄하기도 했다. 또한 이성을 사모하는 마음을 동성으로까지 범위를 넓히는 모습을 보며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생겼다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 사건이 생각났다. 기시베는 마지메에게 “<대도해>는 새로운 시대의 사전이지 않아요? 다수파의 비위를 맞추고 고루한 생각과 감각에 얽매인 채, 날마다 변해가는 말을, 변해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말의 근본 의미를 정말로 뜻풀이할 수 있으세요?” 라고 물었었다. 이 부분을 보며 사랑이라는 항목을 보며 상처받을 수 있는 동성애자들을 넘어서 사전이 지고 있는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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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마쓰모토는 국가가 아닌 출판사가 사전을 편찬하는 이유 중 말이 하나는 권위나 권력과는 무관하도록 표현되어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나는 앞의 기시베가 마지메에게 한 질문과 연관지어가며 읽었다. 사전은 우리가 쓰는 말의 정의를 내려주고 그 단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고착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까 사랑의 예시와 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것이 이성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을 심어주어 동성애에 관해 이질적인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또한 단어에 정치색이 드리워질 수도 있고 마지메가 사이교에 관해 집필한 교수의 글을 대거 수정했듯이 자신의 생각이 많이 담겨있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의 변동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니 그에 따라 늘 사전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도 다시금 되뇌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동안 집에 있는 사전의 단어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내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사전이 주는 정의에 어떠한 위화감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뜻을 모르는 단어를 찾아볼 때는 새로운 뜻을 알았다고 생각했고 알고 있는 단어를 찾아볼 때는 이 단어가 이렇게 정의된다는 것을 알고 그 정의를 받아들였다. 물론 나는 아직까지 개인의 생각이나 권력, 고정관념이 개입된 단어를 봤다거나 그로인해 생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사전을 그만큼 주의 깊게 읽었다기보다는 그저 모르는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만 확실한건 그동안 나는 말의 힘과 사전의 힘에 대해서 매우 무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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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렇게만 보면 ‘배를 엮다’는 단순히 사전의 가치를 다시 보여주기 위해 쓰인 책 같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이 책의 인물들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인물들’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주인공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주인공이라고 하면 당연히 마지메를 떠올리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의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주인공이다. 사전에 평생을 바쳐온 아라키와 마쓰모토를 보면서 일생을 무언가에 바칠 수 있는 주인공의 열정을 볼 수 있고 마지메의 멋없는 편지에도 감동하고 요리에 온 열정을 바치는 가구야와 불평하다가도 어느새 사전편찬을 위해 노력하는 기시베와 종이 하나에도 열정을 쏟는 미야모토 또한 인생을 열정으로 가득 채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특히 여러 인물 중에서 니시오카는 어떤 면에서 마지메보다 더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공감할 수 있는,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작업에 온 열정을 바치지 못하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처럼 그저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과 그런 자신과 마지메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모습을 통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결국 다른 부서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도 느꼈다. 평범한 가장이 되어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이나, 후에도 사전편찬을 위해 다른 부서에서도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마지메보다 더욱 현실성이 느껴졌고 마지메의 삶뿐만 아니라 니시오카의 삶 또한 열정이 가득하고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다.

‘배를 엮다’는 정말로 사전이라는 거대한 배를 그들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하나 엮어가고 수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온 것들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고 간과하고 있었던 말의 힘 또한 실감하게 해주었다. 또한 책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열정이 넘치는 삶은 22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무료하게 살아가는 나를 꾸중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말이란 것은 무엇일까? 또한 그 말을 다루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열적인 삶, 몰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답을 찾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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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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