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Yes, you've done something EPIC [음악]

에픽하이 9집,
글 입력 2017.10.2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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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앨범은 아니었다. 별 다를 것 없이 살고 있었지만 그게 쉽지 않을 뿐. 그래도 콘서트 소식에, 오랜만의 신보에 잊었던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주변 사람에게 자랑도 하고 다녔네. 인정. 이쯤되면 거짓말이다. 기다리고 있었다. 힙합을 잘 모른다. 멜로디가 좋고, 가사가 좋고, 그냥 좋으면 듣는다. 함축된 말로 사랑을 노래하며 여운을 주는 발라드 가사에 비해서 힙합은 좀 더 할 말이 많아도 되는, 좀 더 펼쳐놓아도 되는 장르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절절하고 아프고,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와닿지 않았다. 할 말 많은 나에게는 그게 자유롭게 느껴졌다. 패기로운 곡을 들으면 같이 어깨를 펴고 으쓱하게 되는 것도 장점이고.
 
  에픽하이를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때였다. 애늙은이같이 7080노래가 더 좋을 때라 듣고 넘어갔지만 후렴구는 기억하고 있었다. 평화의 날. '따분하고 온갖 짜증나도 오늘 딱 하루만 참아줘, 바보같고 못난 짝사랑도 오늘 딱 하루만 사귀어줘.' 훈훈한 곡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하루만 네 방에 침대가 되고 싶다는 치명적인 아이돌(정말 너무 좋아하는 친구와 오죽하면 가수때매 가볍게 다투기도 했다)을 좋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는 에 꽂혀서 가사를 외우고 다녔다. '힘들죠, 오늘도 세상은 나를 향해 비웃고 거울 앞에서도 기죽고.' 어린 나이에도 사람이 어려웠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서로 해본다면서 친구와 같이 랩을 따라하고 있던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내가 가수가 된 것도 같고. 나중에야 좀 지나서야 알았다. 가장 유명해진 가 나온 앨범이 마지막 앨범일 수도 있는 이라는 뜻이었고 에픽하이는 저 곡으로 유명해지면서 동시에 너무 대중적이라며 엄청난 비판도 함께 받았다는 사실을. 나의 즐거움 뒤엔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좋아한다는 건 아마도 흔들림없이 그 사람의 궤적을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가는 일일 것이다. 좋아하는 배우는 필모그라피를 쭉 따라 작품을 보고,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고 콘서트를 가는 것. 그가 세간에 시달릴 때는 마음 졸여 괜찮아야 할 텐데, 하며 같이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나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좋다. 나는 그를 알고 있지만 그는 나를 모르니까. 소극적일지는 몰라도 그게 나의 팬으로서의 마음이었다. 앨범을 사면 수록곡을 이렇게 결정했을 때는 의도가 있겠지 싶어 책을 단숨에 읽듯 쉬지 않고 앨범의 모든 곡을 들어본다. 나는 그 순간 날카로운 귀가 된 느낌이다. 첫 느낌이 좋은 곡이 있고 들을 수록 좋은 곡이 있다. 팬이라고 해도 취향은 소나무인지라 가끔은 앨범에서 마음에 드는 곡이 좀 더 적을 때도 있었지만 정말 딱 좋다 싶은 곡은 늘 있었다. 마음에 박혀오는 가사가 늘 있었다. 
 
  힘든 시기에 앨범이 하나씩 나왔고 음악을 들으며 고비를 넘겼을 때가 많았다. 돌이켜보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세상도 나도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버젓하게 있다. 별 일이 아니었던 건 아니었는데. 한창 부모님과 자주 다투던 때, 밥상에서 한 소리를 하시곤 해서 반찬도 집어먹지 못하고 밥만 꾸역꾸역 먹고 방에 들어갈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서러웠을까 싶게도 눈물이 넘쳐났다. 시험을 망쳤을 때, 공부가 잘 안 될 때 노래를 들으면서 다시 기분을 다독이곤 했다. 수능이 얼마 안남았을 때 타블로는 쓸쓸한 목소리로 시작해 고마운 숨으로 끝낸 앨범 <열꽃>을 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갑자기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공부한 그 긴 시간이 고작 이 시험 하나로 결정되는 기분이라 바들바들 떨곤 했다. 끊임없이 그 부담감을 내려놓는데, 그리고 지쳐있는 마음을 토닥여주는데, 수능 당일 아침 집을 나설 때까지도 음악이 함께 했다. 정말 일방적인 관계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아끼는 가수가 떨리고 힘들 때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팬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는 얼굴과 존재감으로도 내가 받은 위안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걸까. 차곡차곡 쌓인 앨범과 말하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을 감사한 마음이어도 충분한걸까.
 
  이번 9집 앨범 제목은 기쁘면서도 애틋하다. . 우리 정말 멋지다는 말은 뒤돌아온 발걸음을 모두 보고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일테니. 모든 발걸음이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도 발자국이 하나의 길을 이루었으니까. 설사 이룬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들 어떤가. 스스로에게 대단하다고, 멋지게 말해볼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좋지 않은가. 우리는 늘 자기 자신에게는 좀 인색한 편이니까. 에픽하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말은 이제 아픔과 치유다. 사랑의 설레임, 즐거움과 기쁨보다도 외로움과 쓸쓸함, 허전함 같은 일면 일면 부정적인 감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곡은 사랑은 끝난 후, 친구와 멀어진 후 시작되었고 몸과 마음이 휘청거리는 모든 이의 마음에 머무른다. 온갖 아픔을 담은 곡을 잔뜩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마지막 곡을 듣고 났을 때쯤 기뻤다. 애써 기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대변해주었기 때문일까. 애당초 아픔과 기쁨이 동떨어져 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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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한지 어연 14년. 9집의 앨범이 나왔다. 결혼도 하고 새 가족을 맞이했다. 한 길을 10년 이상 걸었을 때의 느낌이 궁금하다. 나는 아직 산등성이 하나를 오르고 있는데 여러 번 산등성이를 넘은 베테랑같아 보여서 그런다.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올라갈 때 가끔 생각한다. 마치 내가 가야할 길 같아서.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는 걸까. 끝에는 뭐가 있을까. 아마 내가 팬으로서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14년의 끝에 이런 말을 남길 수 있었듯 나도 같은 시간이 흘렀을 때 저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날이 갈수록 멋지게 살아봐야지. 자고로 인생의 성공은 성공한 덕후, 성공한 팬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고마움과 응원을 가득담아, 이 말을 해주고 싶다. Yes, you've done something EPIC.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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