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당신은 초인종 소리를 듣겠습니까?: 연극 '초인종'

'안개의 나라' 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글 입력 2017.11.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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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안개에 싸인 것만 같던 연극, <초인종>을 보고 왔다. 프리뷰를 쓸 때 너무 연극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곤란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초인종>은 매우 상징적이고 함축적이며 결말까지 궁금해하며 봐야 하는 연극이다. 만약 <초인종>을 볼 계획이라면 부디 이 리뷰는 연극을 다 본 후에 읽어 주면 좋겠다.



"도대체 왜 아무도 안나오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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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에 살다 9년 만에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수아가 초인종을 울리며 극은 시작된다. 수아네 집의 모습은 외국에 살던 자녀가 9년 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펼쳐지는 일반적인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엄마와 딸의 대화는 서먹하며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 아버지는 어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치매에 걸린 상태다. 게다가 관객의 귀에는 잘 들리는 초인종 소리가 자꾸 작아서 들리지 않는다는 대사가 반복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 속에서 궁금증이 안개처럼 떠다닌다. 9년 전 수아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 관객은 주어진 단서들을 모아 퍼즐을 맞춰간다. 마침내 완성된 퍼즐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충격이 지나간 자리에 한숨이 뒤따른다. 성폭행. 극 중 대사처럼 흔하디 흔한 비극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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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혹한 사건 사고도 신문이나 뉴스를 거치면 건조한 몇 개의 문장으로 바뀐다. 매일 쏟아지는 소식들을 접하며 우리는 그 건조한 문장 뒤에 자리한 고통을 잘 상상하지 않는다. 모든 이의 사건 사고에 공감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더러 감정 소모가 큰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차라리 눈을 감는다. 하지만 어떤 사건의 피해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신문이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더 이상 사건이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게 된 다음에도 훨씬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산다. <초인종> 역시 9년 전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수아와 그 가족들이 사건 발생 후 9년이 지나서도 겪고 있는 고통의 이야기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아네 가족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엄마는 살다보면 겪을 수도 있는 일이니 없던 걸로 하자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아버지는 수아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말 성폭행을 당했는지 여부를 재차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인 수아의 목소리는 묻혀 버렸다. 수아가 초인종을 아무리 울려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은 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자의 고통 속에 갇혀 괴로워한다. 물론 사건 이후 수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은 부모에게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수아의 부모를 무작정 비난할 수도 없다. 수아의 부모를 비롯해 수아네 가족 전체는 이 사건의 피해자이고 애초에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돈과 권력을 등에 업고 행복하게 잘 사는 유명 작가이다. 가부장적이지만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딸을 위해 유명 작가를 소개시켜 준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가부장제 속 엄마. 이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데도 숨어버린 가해자는 남겨진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수아의 말처럼 껌을 밟았으면 뱉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똥을 밟았으면 똥을 싼 사람이 있을텐데 왜 그 가해자는 나오지  않는가. 왜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은 뒤로 숨고 남겨진 피해자들끼리 상처를 주고 받아야 하는가. 연극은 지워지는 피해자의 목소리와 숨어버리는 가해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초인종'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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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인종>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연출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고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물고기 역을 맡은 배우가 내내 무대를 대사 한마디 없이 돌아다닌다. 다소 난해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극의 제목이기도 한 '초인종'은 연극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인종은 효과음이 아니라 '딩동 딩동' 하는 배우의 육성으로 표현된다. 정확한 문장이나 의미 있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닌 그저 '아' 하는 소리에 불과할 지라도 기계음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는 감정,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 등 언제나 무언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초인종은 피해자의 목소리다. 그러나 현실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쉽게 묻히듯 연극에서도 초인종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러 번 수아의 대사를 통해 확인된다. 수아는 자꾸만 초인종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알았다고 대답만 할 뿐이고 아버지는 세상에 못 고치는게 어디있냐며 자꾸 헛소리를 한다. 초인종은 수아네 가족의 불통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관객은 어느 시점부터 초인종이 고쳐져야 수아네 가족이 안고 있는 문제도 해결되겠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선택의 기로에 선 수아와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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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을 지배하던 갈등은 급작스럽게 해결된다. 수아네 가족의 불통을 일으켰던 초인종이 고쳐지고 가해자였던 유명작가가 죽음으로써 식구들은 따뜻한 식사시간을 되찾는다. 수아네 집이 세상 전체라면 연극은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연극은 결말 부분에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제 3자를 개입시켜 수아네 집이 곧 세상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아네 집 밖에는 수아가 아니더라도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넘쳐나는 것이다. 늘 밖에서 '딩동 딩동' 초인종을 울리며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했던 수아는 이제 집 안에 있으므로 초인종을 누를 필요가 없다. 대신 선택을 해야 한다.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하는 식구들 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수도 있고 밖에서 죽어라 초인종을 울려야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생각하며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

  연극은 혼란에 휩싸인 수아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났지만 내 머릿속의 수아는 용기있는 고발자였기 때문에 바깥에서 들려오는 다른 초인종 소리에도 모르는 척 하지 않고 기꺼이 연대했을 것이라 믿는다. 한 사람의 용기와 그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연대는 힘이 세다. 극을 보면서 최근에 있었던 '와인스타인 사건'이 떠올랐다. 할리우드의 유명 사업가인 와인스타인이 몇십년 간 수많은 회사 직원들과 배우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러 온 사실이 폭로된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초인종>에서의 유명작가처럼 업계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인물이 가해자였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 명의 용기 있는 고발을 시작으로 폭로는 끝을 모르고 줄줄 쏟아졌다. 그리고 이제 영화계를 넘어 다양한 업계에서 '제 2의 와인스타인 찾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이다.

  보이는 것은 많지 않다. 언제나 사회는 안갯속과 같았고 그 가운데 사회적 약자의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 세상이 정의롭다고 믿는다. 안갯속에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들어야 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안갯속에서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울리는 사람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다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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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초인종>의 결말로 돌아와서, 연극은 수아 뿐만이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연극 안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도 울려퍼지는 초인종 소리를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연극은 통쾌하게 끝나는 복수극인가 아닌가. 안개의 나라에서 우리는 귀를 막고 보이는 것만 볼텐가 아니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울 것인가. 연극은 마음 편히 현실로 빠져나가려는 우리를 붙잡는다. 선택은 관객의 몫이다.
 




<공연 정보>

공연명: <초인종>

공연기간: 10/22-11/5
(10월 30일 휴무)
월-금 오후 8시, 토-일 오후 4시

공연장소: CKL 스테이지

공연시간: 90분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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