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FF] 제대로 파고들자, 악동문자 그래피티 - Ep.2

그래피티, 너를 예술이라 말할 수 있을까?
글 입력 2017.11.08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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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은 ‘그래피티’라는 단어를 들음과 동시에 장 미셸 바스키아 또는 키스 해링을 떠올린다. 한 술 더 떠, 수많은 책자와 온라인 포스트는 그들을 ‘그래피티를 예술의 범주로 올려놓은 작가’라 명명한다. 앞서 예고한 바와 같이 이번 토의는 “그들을 그래피티 라이터(Graffiti writer)라 칭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는 그들의 예술성이나 미학적 가치에 던지는 물음표가 아닌, 장르 구분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의 예술은 벽에서 출발하였다. 바스키아는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 별 것 아님를 조직해 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했고, 키스 해링은 더 많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클럽이나 공공장소의 새카만 벽에 특유의 단순화된 모형을 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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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키아는 상업적으로 ‘데뷔’한 인물이다. 벽에 텍스트를 기반으로 불법적인 낙서를 행한 것은 사실이나, 스스로 인기 있는 주류 화가가 되길 원한 그는 자신의 작업을 티셔츠나 엽서 등 ‘상품’으로 생산해 판매했다. 뉴욕 뉴 웨이브 전시 후 앤디 워홀 등과 같은 유명인과 어울리며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래피티 라이터로서의 익명성은 바스키아가 스타덤에 오름과 동시에 제거되었다. 미술과 트랜드에 관심 있는 미국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그의 얼굴과 작품을 알게 되었고, 언제 지워질지 모르는 주인 없는 낙서였던 작업은 캔버스에 담겨 최고가를 경신하는 회화 명작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팝아트가 된 것이다. 최근 뱅크시가 바스키아 작품의 스타성과 상업성을 비판하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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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동료였던 키스 해링 또한 낙서 장소를 캔버스와 공식 프로젝트 등으로 옮기고, 대중성을 얻음과 동시에 그것을 상업화했다. 물론 수익금을 에이즈 환자를 위해 사용하는 등 큰 사회적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나, 현재의 논점에선 그가 익명성과 반달리즘적 성향을 버리고 스스로의 작업에 상품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자.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래피티가 지닌 공공미술적 특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긴 했으나 그래피티의 본질(Ep.1참조)에서는 많이 벗어난 활동을 한 듯하다. 그들이 그래피티 작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선보인 예술 작품이 스트릿 아트의 범주에는 들지 몰라도, 진또배기 그래피티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의견 대립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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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피티가 무엇인가?”에 대한 완벽한 정의를 내릴 수 없듯이, 이것이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논쟁 또한 끊이질 않는다. 어떤 이는 반달리즘과 버밍에 뿌리를 둔 그래피티를 ‘미술관 밖 예술작품’이라 칭하는 것이 그것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은 나눌 수 없는 것이며, 기존의 단순낙서에서 발전해 사회 풍자와 고발로 나아가는 그래피티의 반사회적 특성이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말한다.
  
 양쪽 모두가 일리 있는 주장이라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주기가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예술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피티가 예술, 구체적으로는 스트릿아트가 되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상품화됨과 동시에 대중에게 맞추어져 가는 그림 스타일을 우려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문화든 피해갈 수 없는 부차적이고 필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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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예술’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높은 곳에 올려두고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흔히 생각하는 고상하고 값비싼 현대미술과 심포니 오케스트라만 예술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굵직한 측면을 풍자하거나 약자의 편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야만 하나? 필자는 예술을 ‘인간에게 감각적으로 영감을 주는 모든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따라서 그래피티 또한 ‘넓게 본 예술’의 일환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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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천가에 그려진 그래피티의 격정적인 필치와 색감이 지나가던 행인의 적막한 감정에 생동감을 부여했다던가, 공공장소에 마음대로 낙서하는 바밍을 목격한 누군가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던가, 감각적으로 훌륭한 태깅을 본 어떤 이가 미적 즐거움을 경험했다던가 하는 내적 동요는 모두 예술적 경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래피티를 좋아하는 본질적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를 기가 막히게 풍자한 작품이야. 나도 이러한 사회 문제에 경각심을 가져야겠어!”, “미술관 밖을 뛰쳐나와 모두에게 예술작품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하는 감상만이 그래피티의 미학적 가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상 이를 예술로 구분 짓고 말고 하는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감상하면 끝인 부분이니까. 그래피티의 불법적 속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살을 찌푸리면 되고, 필자처럼 힙합을 좋아하고 그래피티 특유의 조형미에 관심이 있다면 이 문화를 즐겁게 지켜보면 된다. 하나 분명한 지점은 [SAFF: Street Art Face to Face]라는 이 글의 제목처럼, 그래피티는 건물 외벽, 전봇대, 마감한 상점 셔터 등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다는 거다. 대답은 자유다.


글_전문필진 신예린


[신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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