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지와 의심의 무력, "곡성" [영화]

글 입력 2017.11.14 00: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화 "곡성"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 누가 복음 24장 37-39절
 
 
 한적한 시골 마을, 어느 날인가부터 끔찍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 힘들 만큼 사건들은 연속해서 벌어지자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바로 이 모든 것이 최근 마을로 이사를 온 한 일본인 때문이라는 것.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일본에서 온 외지인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진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외지인의 정체를 밝혀내려한다….

 이와 같은 영화 “곡성”의 줄거리는 고전 설화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모티프입니다. 한 공동체에 외지인이 들어온 후 기이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힘을 합친 토착민들이 외지인을 물리쳐 가족과 고향을 지켜낸다는 이야기는 오늘 날에도 많은 매체에서 반복해 사용되는 이야기 코드이죠. “곡성”은 큰 줄기 상으로는 이러한 구조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이야기와 차이를 갖는 지점은 바로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큰 미끼라는 것입니다. “현혹되지 말라”라는 영화의 메인 카피나, 유행어가 되기도 한 “고놈은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는 그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라는 극중 대사는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도 유효한 말이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 혹은 결말을 둘러싼 논쟁 등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기 위한 ‘미끼’입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촘촘하게 깔려 있는 복선과 맥거핀들은 관객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에 빠져들게 합니다.
 
 
 
Seeing is believing vs. Believing is seeing
 
 영화 내내 수많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던져지는 질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주인공 종구는 경찰입니다. 그의 인지 범위 내에서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당연한 방법은 ‘과학수사’입니다. ‘혈액에서 과다 검출된 독버섯 성분’을 근거로 그는 범인이 독버섯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결론짓습니다. 하지만 연달아 일어나는 사건은 점차 그의 기존 인지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과학수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구는 최근 마을로 이주해 온 일본인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심이 시작되기 전에 그러한 이야기들은 그저 동료와 심심풀이로 하는 무서운 이야기(fiction)에 지나지 않았죠. 사건이 어쩌면 그의 인지 범위를 벗어난, 초현실적인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직접 그러한 경험을 겪고 난 후에야 시작됩니다. 사건 현장 앞에서 마주친 무명과의 대화 후, 이야기로만 들었던 산짐승을 먹는 일본인과 직접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외지인을 대상으로 한 수사를 펼쳐나갑니다.

 처음 종구에게 이 사건은 수사 대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딸이 잠재적 피해자로 지목되면서 사건은 자신과 가족의 생명에 대한 실제적 위협이 됩니다. 이제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만 하는 종구는 절박해집니다. 그는 무작정 외지인의 집에 쳐들어갑니다. 이는 경찰로서 해야 할만한, 혹은 해도 괜찮은 행동은 아닙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가장의 몸부림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종구는 그를 범인으로 확신할 만한 증거를 두 눈으로 확인합니다. 알 수 없는 주술을 행한 흔적들과 그간의 피해자들을 찍은 사진, 그리고 무엇보다 외지인이 다음 피해자로 그의 딸을 점찍었다는 확실한 증거인 딸의 실내화를 발견한 것이죠. 분노한 종구는 그에게 정체를 묻지만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라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입니다. 더욱 분노한 종구는 외지인에게 사흘을 줄 테니 그 안에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돌아옵니다.

 종구의 행패에 외지인이 분노한 탓일까요. 집 안에는 괴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그의 딸 효진의 귀신 들린 듯한 증세는 점차 심해집니다. 병원에도 데려가 보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이제 종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용하다는 무당, 일광을 부릅니다. 일광은 종구에게 외지인이 사실은 귀신이라고 말해줍니다. 또, 그의 사람인 척하는 겉모습에 속아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조심해야한다고도 말해주죠. 이렇듯 그를 두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종구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이지만, 인지와 이해의 측면에 있어서 그는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습니다.

 일광의 도움을 받아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굿을 하던 도중, 종구는 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어 굿을 중단시킵니다. 동료의 소개로 알게 된 부제 이삼은 종구에게 카톨릭 신부에게 도움을 청해볼 것을 권유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찾아간 신부님은 종구의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보지 않은 일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되물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부님의 말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계속 확신을 하시네요. 직접 보셨소?
직접 보도 않고, 어떻게 확신을 허십니까?
병원에 돌아가셔갖고 의사를 믿고 따님을 맡기세요.
교회에서 해드릴 일은 없습니다.


 신부님이 종구의 부탁을 거절하는 논리는 “직접 본 적이 없으니 확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죠. 신의 존재야 말로 가장 눈으로 증거를 확인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아닙니까? 한 번도 신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음에도 신이 실존함을 누구보다 믿고 섬기는 자리에 있는 신부님이 이러한 말을 하다니요. 또, 그렇다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반드시 모두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러한 신부님의 자기모순적인 말은 ‘보이는 것’과 ‘믿을 수 있는 것’간의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합니다.

 결국 모든 시도가 막혀버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들이 점점 더 불가해한 세계로 빠져들자 종구는 ‘그의 세계’의 방법으로 일을 타파하고자 합니다. 친구들과 힘을 합쳐 외지인을 직접 죽이기로 한 거죠. 어찌된 일인지 종구와 그의 친구들을 본 외지인은 나약한 인간처럼 달아납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그들은 외지인을 죽이는 데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이 일단락된 것일까요.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것 같은 긴장감을 떠안은 채, 관객은 숨죽이며 다음 장면을 지켜봅니다.

 
 
무지無知와 의심疑心의 무력無力함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화는 내내 종구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관객은 이 모든 극중 상황을 밖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이지만, 종구가 모르는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무명과 외지인의 존재에 대해서 영화는 관객에게 딱 종구가 아는 만큼 가르쳐줄 뿐입니다. 종구가 극중에서 혼란을 느끼는 만큼 관객도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낯설게 느낍니다. 온갖 샤머니즘적 소품, 주술, 이유를 모르고 계속해서 벌어지는 끔찍한 죽음들. 모두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영화는 이렇듯 관객의 시선을 종구와 완전하게 일치시켜 놓고, 관객이 그가 느끼는 혼란을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가까운 것으로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외지인과, 무명, 일광의 정체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복선들이 관객이 종구의 감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영화는 관객이 외지인을 악마적 존재라고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놓고, 그러한 확신이 드디어 견고해지는 순간 그것을 깨버립니다. 외지인의 죽음 장면이 대표적이죠. 그간 관객이 악마라고 확신해왔던 존재는 종구들에게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존재는 마치 벼락처럼 느닷없이 종구가 몰던 트럭 위에 떨어져 죽고 말죠. 그리고 다시금 나타난 무명의 존재는 관객들을 이른바 ‘멘붕’에 빠지게 합니다.

 그 장면 후부터 결말까지, 종구와 관객 모두는 그동안 해왔던 모든 추축과 의심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외지인과 일광, 무명 사이에 휘몰아치는 모든 복선들은 관객들의 긴장감을 극한까지 몰아붙입니다. 가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에서 종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합니다. 무명과의 대치 상황에서 그는 목숨을 건 선택을 해야 하죠. 하지만 일광과 무명이 만들어나가는 상황에서 그는 여전히 ‘정보의 소외’, 즉 무지의 상황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의심해보아도, 그러한 추측은 전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할 뿐입니다.

 결국 종구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정보의 조합을 통해 무명의 말을 믿지 않고 닭이 3번 울기 전에 집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그때가 돼서야—관객이 이미 직감한 것처럼, 비극은 이미 일어난 후입니다. 관객은 참혹한 현장을 발견하는 종구를 보며 그가 무명의 말을 믿고 기다렸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래보지만, 그 무력한 무지와 의심의 끝에 결국 닭이 세 번 울고 난 후 종구가 집에 갔더라도 과연 더 좋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또한 후반부 무명과 종구의 대치 상황에서 교차 편집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부제 이삼과 외지인의 대치 장면입니다. 그는 종구의 동료이기도 했던 삼촌의 비보를 듣고 홀로 외지인을 찾아갑니다. 이삼은 분명히 죽었음이 틀림없는 외지인을 그의 집 뒤의 동굴에서 발견하죠. 그리고 그의 정체를 묻습니다. 그곳에서 이삼과 관객은 드디어 ‘두 눈으로’ 그의 정체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외지인—악마—는 영화가 시작하며 나온 성경 구절을 다시 한 번 부제에게 읊어주죠.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악마는 심지어 손의 성흔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의 정체를 물었던 부제에게 드디어 답을 주죠.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라며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위에서 신부님이 반문한 것과 같이 드디어 직접 두 눈으로 봄으로써 외지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진 인간의 운명
 
 종구는 영화 내내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외지인을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하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고 해결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은, 종구의 ‘세계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그에게 처음부터 불가해의 영역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 “부조리”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부조리”란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부당함의 유의어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밖에 있는 것을 탐구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뜻하는 말로, 인간이 가진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존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말이었죠. 이러한 카뮈의 입장에서 보면 종구는 그야말로 부조리에 갇힌 인물입니다. 그가 영화 내내 고군분투한 모든 행위는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그의 가족은 모두 죽음을 맞게 되죠.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는 단순히 인간 운명을 극복할 수 없는 비관적 시선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곡성”의 나홍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왜 그분들이 사라져야 하는가’에요. 질문을 갖기 시작한 건 현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저도 궁금했어요. 무서워지더라고요.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숨을 쉬고 살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제 영화를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은 이유 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게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인간은 종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지만, 그러한 시도가 부조리한 세계에서 얼마만큼 유효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그러한 무력한 분투를 행하는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카뮈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가 바윗돌을 산꼭대기로 계속 굴려 올리는 행위를 인간의 삶에 비유했습니다. 어차피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질 바윗돌을 굴려 올리는 일은 애초부터 찾을 수 없는 답을 궁금해 하고 갈구하는, 인간의 삶의 조건과 비슷한 것일지 모릅니다. 의미 없는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으로의 도피인 ‘자살’, 또 하나는 신이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 막연한 ‘희망’입니다. 카뮈는 이 둘 모두 옳은 선택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생각한 마지막 선택지는 바로 ‘반항’입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모두 알게 된 뒤에도 스스로를 징벌하고 온 몸으로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도망치지 않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신의 형벌에 맞서는 것입니다.

 종구와 그의 가족의 죽음은 어찌 보면 허무한 희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영화의 결말을 곱씹으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불가해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종구는 무지했고 무력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세계는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각성하여 다시 일어나야 할지에 대해 감독은 종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한지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