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레이폴(Pray for)] 3. for Runners [영화]

'소년들(Jongens, 2014)'
글 입력 2017.11.2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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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Jongens, 2014)'_미샤 캄프 作


  달리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 손바닥에 땀이 맺히도록,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입 안에 비린 침이 감돌도록, 그렇게 힘차게 달리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온몸으로 공기를 가르고 열을 뿜어내면서 지나친 것들을 오롯이 기억에 새긴다. 우둘투둘한 트랙의 질감과 새벽의 눅눅한 냄새, 서늘하게 휘감는 찬 기운. 무심코 걸어 다닐 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피부로 감각된다. 달리기는, 따라서 내밀한 구축인 동시에 생동에 대한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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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는 달리기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조심히 주자의 뒤를 따라붙는다.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않은 채, 적당한 거리를 두어 결코 그를 앞지르지 않는다. 트랙을 달리는 소년은 응원 같은 카메라의 반주(伴走)에 발맞추어 있는 힘껏 내달린다. 영화는 이처럼 배려 깊은 시선으로, 생생한 숨결로, 쓸쓸한 잔상으로 시작된다. 밝아지지 않은 어스름 아래, 덩그러니 놓인 소년은 차근차근 성을 쌓아 간다. 젊음의 생기로 완연한 그 성은 완전한 소년만의 공간이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경험으로만 채워진 닫힌 곳간이다.

  빠른 발을 인정받아 소년은 계주 팀에 들어간다. 작은 실수가, 한 명의 컨디션이 전체 기록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경주. 개인적인 행위가 집단적 활동으로 치환되는 순간, 소년은 누군가 자신의 성문을 두드리는 것을 듣는다. 차분하게 문을 열어줄 것을 기다리면서 집요하게 노크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소년은 외시경으로 바깥을 살펴보다 문을 연다. 미처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리고도 신중하게. 여차하면 곧바로 불청객을 쫓아낼 수 있도록 한 손에는 작은 몽둥이를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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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소년 시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놓치고 지나왔는가. 보이지 않는 사회적 제약과 성(性)적인 세뇌는 인간의 감각마저 무디게 한다. 동성에 대한 감정은 모두 우정이라는 통념, 그 선을 넘은 감정을 터부로 치부하는 의식 들은 우리의 성문을 더욱 두껍게 만든다. 동성에게 느끼는 감정과 행동이 특별하다고 느끼면서도 우정인지, 집착인지, 사랑인지 혼란스러워한다.1) 소년기, 문득 들려오는 성문 바깥의 기척을 단번에 사랑이라고 알아챌 성숙은 아직 없다. 단순한 호의로 생각하2)며 돌려보낸다.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오면 안 되는 곳이라고, 짐짓 찾아온 사람은 물론 자신마저 타이르며.

  청소년기는 성별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성적 지향에 눈을 뜨는 시기3)이다. 단순히 이성애적 교육만 받아온 그들에게 다른 성적 지향은 낯설고, 두렵고, 피해야 할 비도덕적 산물이다. 우리의 소년, 시거는 이러한 일련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좋은 예가 된다. 그의 성문 앞에 찾아온 사람, 마크는 물수제비처럼 시거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시거는 그 접근이 반가우면서 한편으로 경계가 된다. 마침내 그것이 불청객이라고 단정한 뒤 단호하게 말한다. “나 게이 아니야.

  시거는 자기의 감정을 부인한다. 동성을 향한 감정은 형의 비행(非行)보다 더 크고 어긋난 일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감추고 부정하고 싶은 그는 형의 노는 무리에 끼어 이성 친구를 만들고 억지로 입을 맞추어도 본다. 게이가 아니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는 듯, 시거는 마크를 밀어내려 애쓴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쉬웠다면 이끌리지도 않았을 것. 열린 문틈으로 발을 들이민 그는 이내 시거의 닫혀 있던 성을 열어젖히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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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그를 보는 시거는 여전히 떨떠름하다. 마크를 안으로 들여 대접하면서도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수는 없다.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운 일인 것이다.4) 혼란한 마음은 마크에게까지 전이된다. 기대하고 찾아왔던 마크는 그 마음마저 부정당하는 것에 실망한 채 성을 나간다. 달려와 팔을 붙잡아 달라고, 가지 마라 말해달라는 듯 천천히 움직여보지만 시거는 다가갈 수 없다. 자기가 쌓아 왔던 견고한 성을 무너뜨려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의 손을 잡으면 속절없이 붕괴할 것 같았기에.

  마크와 시거의 호흡은 자꾸만 어긋난다. 계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턴을 넘겨주고, 떨어뜨리지 않게 받는 일. 시거의 손은 허공을 휘젓는다. 손끝은 어디에도 닿질 못한다. 상심한 배턴은 땅에 떨어진다. 챙, 챙, 쇳소리가 바닥을, 시거의 공간을 울린다. 급격한 파문으로 시거의 몸을 흔든다.

  두 사람이 아직 서먹할 무렵, 시거는 달리기 기록을 재지 않는다는 마크의 말에 의아해 하며 물었다.

기록을 재야 집중이 더 잘 되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뛸 때 기록이 더 좋더라고.

마크는 가볍게 웃고 말을 잇는다.

"어떤 때는 뛰고 있단 걸 잊기도 해."

 내키는 대로, 마음에 맞는 대로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는 마크에게 시거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온전히 그 감정을 받아들일 때에야 더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시거는 모른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이토록 혼란으로 모는 것은 단연 죄책감이다. 도덕적 일탈을 저지르는 것만 같고,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듯한 자기혐오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 놓고 고민을 상담하거나 자신의 느낌에 대해 설명할 사람이 없을 때의 고립감5)은 그들 존재를 더 구석진 데로 파고들게 한다. 빗장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마음을 숨기게 한다. 시거가 마크에 대한 감정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도 그 고립감이 해소될 가능성이 보인 때였다. 형의 비행 행위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처음으로, 단호하고도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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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램펄린 위로 한 소년이 뛰어오른다. 카메라에서 그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자 또 다른 소년이 뒤이어 모습을 보인다. 둘은 몇 번 번갈아 뛰더니 이제는 동시에 허공으로 뛰어든다. 팔을 휘저으며 짜릿한 비상을 만끽한다. 힘이 빠진 둘은 서로의 몸을 겹쳐 눕는다. 서로를 향해 고개를 튼다. 최대한 눈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본다. 공중에 떠 있던 순간의 이름 모를 감정이 그 사이에 피어난다.

  달리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고독은 모종의 결핍이다. 결핍은 서로의 결핍을 향한다. 달리는 것은 곧 갈구하는 일이다. 마음을 깨닫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이는 일이다. 그 끝에서 문이 열리고 웅크려 있는 소년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소년의 손을 잡고 일어나 문밖으로 달려 나가게 될지 모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도록 힘차게 내달릴지 모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참고문헌

1) 송윤옥, 「청소년 성정체성 발달과정 : 사이버 동성애 상담사례 중심으로」, 학위논문(석사), 명지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 2007, p. 42
2) 송윤옥, 위의 논문, p.37
3) 오근숙, 「보이지 않는 아이들-성소수자 청소년들」, 특별기고, 중등우리교육, 2005, p. 6
4) 주재홍, 「한국의 청소년 성소수자들로부터 알게 된 그들의 삶의 이야기들」, 일반논문, 교육문화연구 제23-1호, 2017, p. 15
5) 오근숙, 앞의 글, p. 4


[강범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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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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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12기 에디터 손진주입니다.

      달리기는, 따라서 내밀한 구축인 동시에 생동에 대한 예찬이다. 도입 중 가장 좋은 문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에디터님은 (비유적으로나) 한번쯤 숨이 차오를때까지 뛰어본 적 이 있었을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글 전체를 읽으면서 에디터님의 감수성이 참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 과정을 아름답게 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글을 모두 읽고 나서 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영화리뷰는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담을 안겨주게 되는 부분이 참 많은데 , 이 글은 그런 부담이 적게 줄거리를 잘 설명해준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단도 에디터님의 좋은 감수성과 잘 어우러져 훌륭한 마무리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소 논문의 사용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논문이 인용된 부분은 논문이 아니더라도 에디터님의 말로 잘 표현될 수 있을만한 부분인데 굳이 논문을 인용해왔어야 했을까 싶습니다. 많은 내용을 말하고 싶은 것이 느껴지고, 그 논문들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잘 느껴지지만 에디터님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멋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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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
    • 2017.12.03 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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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꼼꼼하게 읽어주시고 논평해주신 점에 대하여 먼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립니다. 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말에 저도 다시금 영화와, 이 순간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글이 딱딱하고 건조한 편이다보니 항상 읽는 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손진주 에디터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시니 얼떨떨하면서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br/>논문을 인용한 부분은 저도 과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학교 과제로 에세이를 쓰던 버릇이 휴학한 이후에도 남아 오히려 지저분하게 표현된 것 같네요. 청소년 성소수자에 관련한 정보를 전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전체적인 글 내용과 충돌하는 지점도 여럿 보입니다. 주신 말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얘기해주신 부분을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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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
    • 안녕하세요, 11기 에디터 최서영입니다.

      우선 좋은 글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에디터님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시선을 느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미지와 글의 효과를 적절히 이용하셔서 보다 직관적으로 글을 읽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볼드체나 다양한 강조 표시를 통해 글을 구성해 나가셨는데, 그 효과가 너무 다양해서 보다 적은 효과로 일관적인 구성을 갖추었다면 더욱 좋은 글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내용을 잘 담아주셔서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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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
    • 2017.12.05 17: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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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부족한 글임에도 읽어주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주시는 마음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지적해주신 부분에 있어서는 저도 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수습 기간 동안 대표님이 글을 좀 꾸며보라는 피드백을 받고 너무 열심히 그 말을 따른 것 같습니다. 과한 장식이 오히려 가독성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서영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문장에 관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가벼워 보이기 싫은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는 것도 같고, 겉멋만 드는 것도 같고, 이래저래 갈피를 못 잡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간결하고 따뜻하다고 이야기해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의지가 굳어지는 것 같습니다. 주신 말씀 다시 한 번 감사히 받잡고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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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
    • 2017.12.07 07: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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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오피니언을 읽으면서 강범석 에디터님의 글이 솔직함을 담고 있다고 느꼈어요.
      댓글로 달아주신 문체에 대한 고민에서도 그랬구요!

      그래서 굳이 글을 다채롭게 장식하지 않더라도, 문장을 덜 혹은 더 꾸며야 할지 고민하지 않더라도
      에디터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편안하고 솔직하게 표현하시면 충분히 잘 전달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도 이미 솔직하게 표현하고 계시니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쓰시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거예요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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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annabeED
    • 12기 에디터 류승희 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추상적으로 느껴져 와닿지 못할 수도 있는 장면의 묘사를, 적합한 단어를 골라내어 강조하여 사용해주셔서 범석님만의 감상이 시각화되는 듯한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또한 짧은 문장을 사용하신 것도 글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들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이 인상 깊게 남아 범석님의 감상 뇌리에 박혀 깊이 공감되고, 여운까지 남기게 하는 듯 합니다.
      그렇지만, 줄거리, 참고문헌, 감상, 느낀점 등이 잘 구분이 되지 않아 위의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 수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횟수가 더러 있었습니다. 몰입된 와중에 범석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예측하며 읽기에 문단의 내용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접속사를 가끔 사용해주신다면 범석님의 글에 더욱 집중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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