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캔버스 위, 현실의 초상화와 작품의 초상화 : 연극 < 비평가 > [연극]

글 입력 2017.11.2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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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을 이야기할 때, 창작자의 작품(work)이 선행하는 것으로, 비평가의 비평은 그에 종속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비평가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에 주석을 다는 해설자로, 혹은 문장에 하이라이트를 긋고 냉혹한 말만을 내뱉는 엄격한 선생님으로,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많은 매스미디어에서 냉혹하고 엄격하고 어딘가 까다로운 이미지의 지식인을 비평가라고 내세우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평가는 저런 얼굴이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비평이 작품의 시종 격이라고 말하기엔, 기실 많은 예술은 담론의 장 안에서 발전해왔다. 예술의 판도를 바꾸고, 변혁을 이끈 공은 작품 하나가 아니라, 그에 대한 충실한 논의들에 있는 것이다. “작가가 현실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비평가는 작품의 초상화를 그린다.” 현실의 초상화와 작품의 초상화는 한 캔버스 안에 담기며, 서로 침범하고 반영해가면서 예술은 더욱 고차원의 초상화로 나아간다. 비평과 창작은 그렇기에 예술이라는 유기체 속 동등한 위상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이론상으론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창작자와 비평가의 관계가 마냥 바람직하고 유쾌할 리가 있겠나. 작품을 내놓는 창작자와 그 작품에 펜촉을 세우는 비평가의 관계는 필연적인 긴장관계일 수밖에 없다. 텍스트를 사이에 둔 긴장관계와 현실 속 모종의 권력관계는 창작자와 비평가를 링 위에 세운다. 연극을 말하는 연극, <비평가>는 이 긴장관계에서 출발한다. 씨실과 날실로 짜여진 그물 속에서 언어로 대화를 나누던 비평가와 창작자가, 한 집에서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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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링과 오이디푸스


<비평가>는 <맨 끝줄 소년>(후안 마요르가 작)과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의 메타포를 안고 있다. 작가 스카르파와 비평가 볼로디아, 제자 클라우디오와 스승 헤르만. 한 편에는 연극을, 소설을 만드는 창작자를, 또 한편에는 그 작품을 쓰도록 추동한 스승이자, 가장 날카로운 독자인 비평가를 위치시킨다. 스카르파와 클라우디오의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은, 볼로디아와 헤르만이라는, 오이디푸스적 의미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규정해주었다. 그리고 부친 살해, 즉, 아버지의 세계를 아들이 부수고, 아들은 세계 속에 새로운 질서로 군림하게 된다. 소설을 쓰는 클라우디오의 욕망이 헤르만의 질서를 넘어서듯, 연극을 쓰는 스카르파의 욕망은 볼로디아가 가진 진실 그 이상을 담아낸다.
 
<맨끝줄 소년>이 창작의 과정을 서사의 큰 흐름으로 구성했다면, <비평가>는 작품이 쓰인 이후의 상황을 통해 창작자와 비평가 간의 긴장관계를 담아낸다. 이 아버지와 아들, 비평가와 창작자는 링 위에서 글러브를 끼고 있다. 두 사람이 재현하는 스카르파의 새 연극은, 두 인물의 긴장관계를 담아내는 극중극으로 기능한다. 권투선수 에릭과 그의 스승 타우베스의 서사는 스카르파와 볼로디아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이때, 권투장의 링 대신, 책으로 만드는 사각의 링은, 스카르파와 볼로디아의 결투가 텍스트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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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자기 분신과 싸우는 거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대항하는 게 아니라
한 몸인 두 사람이 세상에 대항하는 겁니다.”
 

스카르파는 에릭과 타우베스가 사실 한 몸인 두 인물이라고 밝힌다. 마치 한 캔버스에 스카르파가 그리는 현실의 초상화와, 볼로디아가 그리는 작품의 초상화과 겹쳐지듯 말이다. 내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작품은 핍진하지 않다, 서로에게 쓴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사실 두 사람은 연극이라는 한 캔버스 내에서 유기체의 일부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관계의 긴장과 아이러니함은 무대의 추상성에 의해 힘이 실린다. 비평가 볼로디아의 집을 구현한 무대엔, 수많은 책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소품은 예상치 못한 책 더미 속에서 등장한다. 현실의 집이라기 보단, 누군가의 머릿속 같은, 무대의 추상성은 현실에서 대립하는 스카르파와 볼로디아, 그리고 텍스트를 두고 형이상학적인 결투를 벌이는 창작자와 비평가. 현실과 형이상학이라는 이중 구도를 비교적 무리 없이 담아낸다.



짜고 치기라는 속어처럼 가짜다

 

“아름다우면서 잔인한 제1막이
몰락해 가는 권투에 대한
열정적인 서사를 전해 준다면,
제2막은 연극이 아니라, 짜고 치기라는 속어처럼,
싸움도 여자 인물도 가짜다.”
 

‘연극은 ‘진실’을 담아내야 한다, 그러나 스카르파는 그러지 못했다‘는 볼로디아의 펀치. 이에 스카르파는 반격의 펀치를 날린다. 누구보다도 연극을 사랑하고, 진실에 대한 민감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로디아는 자부했지만, 사실 그가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여자 인물이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여자의 형상화라는 사실은 볼로디아를 쓰러트린다. 볼로디아가 수건을 던지고 패배를 인정해야 할 만큼의 일격에 작품 역시 급작스럽게 결말로 안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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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메타포를 안았기 때문일까. 등장하지도 않는 여자가 링 위에 등장하며, 스카르파와 볼로디아의 관계를 재편한다. 아들 스카르파는 ‘아버지의 여자’의 진실을 텍스트 속에 담아냈고, ‘아버지의 여자’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로 볼로디아를 링 밖으로 몰아낸다. 아버지의 세계를 내적 진실로 깨부수고, 스카르파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들의 승리다.
 
볼로디아가 ‘연극에서 경멸하는 가짜’에, 실은 ‘삶의 진실이 깃들어 있었음’은, 여성 인물의 존재로 증명된다. 여성 인물의 존재 자체, 그리고 모든 발화들은 추상성으로 꽁꽁 감싸져 있다. 이 추상적인 여성 인물이 담론의 주제가 되자, 현실과 형이상학이 교차되었던 링은 현실의 영역으로 내려온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여자의 진실이 연극에 담겼느냐가 아니라, 여자의 행방이다. 여성 인물을 두고 링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두 인물에, 이전에 느꼈던 치밀한 긴장관계는 느끼기 힘들다. 심지어, 여성 인물이 이 팽팽한 긴장 관계에 돌파구가 되어, 아들의 손을 들어주는 전개는 너무 ‘가짜’같이 느껴진다. 짜고 치기라는 속어처럼, 싸움도 여자 인물도 가짜다.’ 볼로디아의 구겨진 비평이 다시금 떠오르는 이유다.
 
  
 
진실이 남기는 파문


어중간하게 해소되어버린 긴장관계에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이 메타연극이 보여주는 연극에 대한 물음과 고찰은 분명히 다가온다. 현재에 흐름에서 벗어나 저항하기 위한 눈을 준비해야 한다는, 스카르파가 비평가의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전하는 당부는, 거짓을 팔고 진실을 숨기지 않아야 한다는 볼로디아의 가르침을 담는다. 무대 전체를 비추던 조명이 스카르파 앞의 작은 조명만을 남기고 소등될 때, 무대 벽면에 진 그림자, 스카르파는 쉴 새 없이 글을 써내려간다. 앞으로 만날 많은 연극들이 스카르파가 쓸 글처럼 진실을 담고 있기를, 저항하는 눈으로 세상에 대한 초상화를 그려주기를. 엔딩을 보고 있자면,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그런 바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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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자기 자신에게 박수를 친 겁니다.
왜냐하면 무대에서 본 것이
자신들의 거짓을 지지해 주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워낙 뿌리 깊은 거짓의 시대에 살아서,
만일 누군가 조금이라도 진실을 무대 위에 올린다면
사람들은 세상을 태워버릴 기세로 극장을 나서게 될 겁니다.”
 

덧붙여, 볼로디아가 관객에게 가한 일격이 꽤나 아팠었나보다. 연극인들을 향한 관객으로서의 바람과 함께 관객으로서의 나 자신은 어떻게 연극을 만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동한다. 내가 찬사해 마지않았던 작품이 정말 삶의 진실을 담고 있던 것인지, 진실을 담은 이야기엔 더럽고 추잡하다고 침뱉어 오진 않았는지. 관객 역시 현재의 비근한 흐름에서 벗어나 저항하는 이야기를 기꺼이 알아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의 초상화가 제대로 그려졌는지, 그리고 작품의 초상화가 제대로 그려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눈 말이다. 연극 <비평가>가 남긴 것은 연극이라는 캔버스에 어떤 초상화가 그려질지, 관객으로서의 나는 앞으로 어떻게 그것을 바라볼지, 끝없는 물음의 파문이다.





■ 참고
김소연, 「비평 없는 시대 비평가로 살기」, 『춤과 지성』 제5호, 한국춤문화자료원, 2013.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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