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뱉어지고 삼켜지는 ‘가장’과 폭우에 쓸려져 내려가야 할 : 연극 < 스테디 레인 > [연극]

글 입력 2017.11.25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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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와 비루한 거리

 
신을 기만한 죄로, 시지프스는 산 위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바위를 밀어 올리면, 가파른 경사를 따라 바위가 굴러 떨어진다. 그럼 밑에서부터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영원한 형벌. 까뮈는 이 영원한 형벌이 인간 존재 모두가 처한 상황이라고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는 더러운 뒷골목이었다. 인간의 눈에서 신이라는 렌즈와 인간 이성이라는 렌즈가 빠지고, 맨 눈으로 보게 된 세상은 의미라곤 없어진, 잔혹하고, 더러운, ‘비루한 거리’의 맨얼굴이었다. 더 이상 세계는 홈즈의 추리로 한 명의 범인을 검거하면, 아름다워지는 곳이 아니었다. 공권력과 범죄자와 자본이 결탁한, 그야말로 화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세계와 개인의 어긋남으로, 인간은 시지프스처럼 영원한 형벌을 겪어야만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전지전능한 신과 인간 이성에 대한 전후인들의 불신과,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noir)의 발달이 맞물려가며, 대도시의 그림자는 이야기 속에 담기게 된다. 연극 <스테디 레인>이 그리는 세계 또한, 대도시의 그림자이다. 극은 더럽고, 역하고, 조악한, 인종차별과 폭력과 창녀와 식인종이 모두 도사리고 있는 비루한 거리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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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배경인 시카고는 비루한 거리이다. 인간의 피부색과 국적은 조롱당하고, 합법적인 폭력과 불법적인 폭력이 쓰레기마냥 더럽게 얽혀있다. 포주와 창녀, 창녀와 경찰이 얽힌 곳이고, 날카로운 둔기와 총이 인간을 위협하는 곳이다. 주인공 대니와 조이는 시카고의 뒷골목이, 경찰인 자신들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뒷골목을 안고 있는 시카고 전체가 부박한 세계의 온상이다. 이때, 도시에 내리는 비는 거리의 모든 찌꺼기들을 도로 위로 내보인다. 빗소리는 단 한 순간도 들리지 않지만, 이 극에서 물리적인 빗소리는 중요하지 않다. 도미노처럼 연쇄되는 사건들 속에서 내내 비는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고, 도시의 추악함은 그 맨얼굴을 드러낸다.



‘가장’이 지켜야할 것, 피에타의 이미지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있는 단출한 무대에서, 대니와 조이는 관객을 설득하듯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비루한 거리 위에서, 비가 모든 찌꺼기들을 토해냈을 때의 모든 일들을 말이다. 관객이라는 청자를 설정해놓고, 자기변명이 될 수도 있는 말이 대니와 조이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관객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는 대니와 조이의 항변은, 비루한 거리에서 자신들이 한 모든 일이 ‘가장’으로서 해야만 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나와 화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으로서 행동했다는 것이 대니와 조이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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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사람들, 대니의 아내 코니와 그의 아이들, 창녀 론다와 그녀의 아이는 그래서 피에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대니와 조이는 그 여자에게서 ‘성스러움’과 욕망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리고 코니와 론다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인식에까지 이른다. 이때, 피에타 형상을 한 코니를 남편의 친구인 조이가 목격한 것이, 피에타 형상을 한 창녀 론다를 대니가 목격한 것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었다. 대니는 론다와 관계를 가지게 되고, 이에 화가 난 포주가 제도 연필 모양의 막대로 대니를 찌르고, 대니 허벅지에 난 상처가 모든 것을 감염시키기 시작한다. 평온함의 상징이었던 대니 집 TV에 총탄이 날아와 박히고, 대니는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조이는 코니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집’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두 사람의 명분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생동하게 되고, 평생을 함께 했던 파트너 대니와 조이는 집의 ‘가장’이라는 하나의 자리를 두고 갈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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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뺀 하나의 나무 막대가 전체를 무너뜨리듯, 대니와 조이의 긴장 속 하나의 오판이 대니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왜곡된 피에타 형상들은 대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만난 베트남 아이는 대니의 품에 안겼지만, 대니는 자신이 보호자라고 주장하는 금발 남성의 품에 아이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아이를 안고 돌아서던 이 남자는 피에타의 탈을 쓴 악마였고, 아이는 끔찍한 사체로 돌아온다. 또한, 대니는 피에타를 총살하는 우발적 실수까지 범한다. 범인을 쫓던 대니는 포주의 동생 윌리를 총살하게 되는데, 대니가 위험상황이라고 인식했던 윌리의 행동은 사실 품 안의 작은 강아지를 지키려던 것이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누가 악마인가. 혼란스러운 사회 속, 피에타와 악마를 구분하지 못했던 ‘가장’은 가장 처절하게 몰락하게 된다. 가족, 사회, 친구, 모든 것은 대니를 세계 밖으로 뱉어버린다.

 
 
뱉어진 대니와 삼켜진 조이

 
‘제도 연필’ 모양의 막대가 대니의 모든 것을 감염시켰다는 설정은 대니를 세계 밖으로 내몬 기제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적 폭력으로 대응하는 대니는 세계에서 삼켜지지 못한다. 대니는 ‘그게 논리적인 거잖아요.’라고 소리 높여 외치지만,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벌인 모든 범법, 폭력 행위들은 법치주의 국가에선 삼켜질 수 없는 쓰디쓴 것이다. 물론, 세계는 더러운 찌꺼기들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암암리에 폭력에 눈감아주기도 하지만, 피에타의 탈을 쓴 악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되려 피에타에게 총을 쏜 대니를 세계는 삼켜주지 않는다. 영웅이 될 수 없던 대니는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경사회의 논리로 살아가려 했던 윌리와, ‘연필’로 대표되는 법치주의 사회와 합치하지 않았던 대니. 세계에 부합하지 못한 인물의 끝엔 자살만이 기다리고 있다. 대니가 자살하는 씬에선, 무대 전체를 비추던 단조로운 조명이 일순간에 대니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떨어트리며, 관객이 대니의 움직임과 죽음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커다란 총소리를 들려주지 않고도, 대니가 맞은 끔찍한 죽음은 객석으로 온전히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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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가 상처에 감염되어 점차 세계 밖으로 밀려날 때, 홀로 독신 아파트에 거주하며 술이나 마시던 세계 밖 조이는 점차 대니의 가정 안으로, 코니 곁으로, 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한다. 범인을 색출하려 혈안이 된 대니 대신, 조이는 코니 곁을 지키며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다친 아이를 돌보며, 가정 내의 새로운 ‘가장’이 되어간다. ‘가장’의 역할을 하겠다며, 점차 세계 밖으로 밀려났던 대니와는 상반되게, 조이는 대니의 틈을 채우면서 ‘가장’으로 거듭나고 세계 안으로 밀려들어오게 된다. 시카고가 원하는 인물상, 법치주의 사회상과 맞는 인물이 그림 속에 남는다. 세계가 그린 그림에 어울리는 인물 조이는 대니가 지워진 자리를 꿰찬다. 대니 앞의 리모콘과 조이 앞의 총으로 시작했던 극은, 결말에 이르러 리모콘과 총 모두 조이 앞에 건네진 채로 끝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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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그림엔 어쩐지 석연치 않은 찝찝함이 남는다. 조이가 ‘가장’의 자리에 앉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그림 위로 솟는다.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대니와 조이를 유심히 살피다보면, 두 인물이 다른 방향으로 생동하는 와중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진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형 르노차를 쫓는 대니를 구술하는 씬에서 대니와 조이의 진술은 다소 어긋나는데, 이 어긋남은 대니와 조이가 말하는 것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드러내진 않음을 방증한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관객으로선 알 수 없으나, 모든 진술이 절대적으로 투명하진 않을 것이라는 의심은 꽤나 많은 변화를 이끈다. 뱉어진 자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편입된 자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의도적으로 후자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전개에, 관객은 역으로 조이의 진술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림 안으로 들어가게 된 자의, 살아남은 자의 진술은 믿을 만한 것일까. 믿음의 균열이 이후 전개에서 유의미하게 포착되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쉽지만, 이 찝찝함은 조이를 마냥 완벽한 ‘가장’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의도한 것이라면, 성공한 것이다.

 
 
2017년에 두 ‘가장’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전적 ‘가장’과 새로운 ‘가장’의 교차,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조이의 인식과 죽은 대니가 조이 앞으로 돌려놓는 총은 이 비루한 세계 속에서, 조이 또한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안면 재건에 드는 비용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조이는 다시 재건한 집 안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대니처럼 총을 들어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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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극 내내 부정당한 대니의 ‘폭력성’이 극의 결말에 이르러 다른 색채를 입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이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대니처럼 총을 들어야 한다면, 대니가 뱉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대니가 뱉어진 것은 단지 피에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내 코니에게 반지 낀 손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죄 없는 사람을 다리 밑으로 추락하게 했던 대니의 정제되지 않은 폭력성이 세계가 그를 뱉어내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런데, 대니의 총이 조이에게로 넘어갈 때, 대니의 조악한 폭력성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변호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비루한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니, 다시 총을 들 새로운 ‘가장’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모성과 성스러움으로 포장되어, 대니의 세계에서 조이의 세계로 넘어간 수많은 피에타들을 위해서? 그림의 중심인 ‘가장’을 만들기 위해 단지 배경으로 자리했을 뿐인, 수많은 약자를 위해서?
 
세계와 합치하지 못하는 인물과 그 인물의 죽음 앞에서, 그의 면면을 긍정하는 <스테디 레인>의 방식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닮아 있다. 그러나 2007년 시카고에서 초연으로 올랐고, 2017년 한국 무대에까지 올라온 <스테디 레인>은 너무도 낡은 방식으로 가정과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았던 마구잡이식 폭력에서 ‘폭력’만을 긍정하여, 새 ‘가장’에게 위임하였다면, 우리는 이 새 ‘가장’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겠나. 그가 앞으로 피에타를 지키려 총을 든다면, 그 폭력은 뱉어질까, 삼켜질까. 기실 이런 질문조차 너무 현실성 없는 질문들로 느껴질 만큼, <스테디 레인>이 안고 있는 목소리는 2017년의 관객에겐 너무 낡은 것이다. 차라리, '가장'이라는 역할 자체에 의문을 던지거나, 여전히 총을 든 새 ‘가장’ 앞에서, 그림 속 배경으로만 위치했던 피에타들의 욕망과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새롭고 유의미했을 것이다. 과거에 어쩔 수 없었던 ‘가장’과 앞으로 어쩔 수 없을 ‘가장’은 글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더 이상 만나고 싶지가 않다. 폭우에 ‘가장’의 맨얼굴을 보여준 유구한 역사가 있으니, 이제는 멀리 쓸려 내려가야 할 차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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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제공 : 노네임씨어터컴퍼니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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