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찝찝한 공감을 일으키는 연극 스테디 레인

글 입력 2017.11.2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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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컴컴한 극장, 하얀 조명과 그 아래 숨죽인 채 놓여 있는 하얀 무대, 하얀 책상, 하얀 의자. 심지어는 공기마저도 깔끔하게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결벽증적인 무대가 연극 <스테디 레인>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주인공 대니와 조이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폭우가, 그리고 두 사람의 말들이 지겨우리만치 쏟아졌고, 무대는 점점 진흙투성이가 되어 엉망진창으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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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향은 다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늘 함께였던 대니와 조이는 자칭 시카고 최고의 경찰이라 자부하며 언젠가 스타스키와 허치 같은 경찰이 될 것이라 믿는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대니는 시카고 뒷골목 창녀들의 뒤를 봐주는 대가로 포주들에게 흉악하게 굴기로 유명한 반면 조이는 독신자 아파트에서 혼자 술을 들이키며 시간을 보낸다. 서로 극명하게 다르지만 큰 문제없이 흘러가던 나날들에 돌연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극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니가 포주에게 구타당하고, 정체불명의 총알이 창문을 깨고 들어와 어린 아들이 부상을 당하고, 약에 취해 벌거벗은 아이를 삼촌이라는 사람에게 의심 없이 돌려보냈다가 남자가 연쇄살인범임이 밝혀지면서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되고...어느 하나 쉬운 것 없는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야가 뿌옇게 번지는 폭우, 그 난장 속에서도 두 사람의 삶이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만큼은 뚜렷한 실선으로 그려졌다.
 
 그저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헌신하는 아빠로만 보였던 대니는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진 뒤로는 물불가리지 않고 오로지 범인을 찾는 일에만 몰두하며 철저히 무너져 내리다,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만다. 그런 대니를 대신해 친구로서 대니의 가족을 지켜주던 조이는 그제 서야 자신이 혼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듯, 그 속으로 점차 빨려 들어간다.

 느와르는 보통의 히어로물이나 액션물과 달리 도덕과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본능, 어떤 신념에 대한 이야기다. 느와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악의 구분이 뚜렷함과 동시에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느와르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배경으로 해서 그렇다. 대니와 조이는 경찰이지만 밝은 대낮에 선량한 시민들을 지키기 보다는 깡패, 강도, 마약쟁이, 창녀가 득시글대는 야밤의 골목길을 무대로, 딱히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활동한다. 그러니 느와르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성적으로는 분명 ‘그름’에 해당하지만,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된 이상 부정, 추함, 혹은 악이라는 가지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대니가 창녀와 관계를 맺지만(우연이라 하더라도) 가족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조이가 대니의 가족 내에서 대니의 자리를 꿰찬 것 역시 사실이지만, 대니의 가족이 주는 그 따스함에 홀린 듯 빠져드는 것을 쉽사리 삿대질을 할 수는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찝찝한 공감을 자아내는 데 하나의 촉진제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2인극이라는 요인이다. 여럿이서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것도 물론 즐겁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와 상대방 이렇게 두 명이서만 대화를 나누는 걸 더욱 선호한다. 서로 눈을 맞추고, 목소리와 표정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그렇다. 연극도 다르지 않다. 무대 위에 선 인물들은 연극의 내용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 숫자가 오로지 둘일 때, 대화는 더욱 부각되며 중심에 선다. 

 연극 <스테디 레인>에서 폭우처럼 쏟아졌던 건 끔찍한 사건들뿐만이 아닌 두 사람의 말들이었다. 2인극 하에서 대니와 조이는 두 시간을 꽉꽉 채워 격렬하게 대화하고 치밀하게 독백한다. 주인공들의 흥미진진한 ‘핑퐁’과 내면을 온전히 드러내 놓는 솔직함으로 무장한 대니와 조이를, 관객으로서 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없는 시련들 속에서 그들이 저마다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이 스토리의 끝자락을 핑크빛이 아닌 핏빛으로 물들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미 나는 두 사람이 당시에 ‘최선’이라고 믿는 행동을 했을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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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되었던 총알의 주인은 연극이 막을 내릴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무대에 남은 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쳐버린 비와 물웅덩이, 씁쓸한 본능과 한 사람뿐이었다.

   



 스테디 레인 

2017. 10. 27 ~ 2017. 12. 03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평일 8시 / 토일 3시, 6시 / 월요일 공연 없음

전석 4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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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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