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TRPG,테메노스의 오락 [게임]

글 입력 2017.11.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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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기묘한 이야기>에서 주인공 일행들이 TRPG를 하는 모습



[OPINION]
TRPG, 테메노스의 오락


필자가 어렸을 적에는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가 유행했었다. 만화는 죽은 어머니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 동생의 몸과 몸 일부를 잃은 주인공이 전설의 현자의 돌을 찾는 과정을 그려냈다. 주인공이 여러 물질을 모아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고 솟아나게 하는 모습은 당시 아이들의 로망이 되기에 충분했다. 당시에 수많은 뽑기 통에 에드가 착용하던 펜던트가 상품으로 걸리고, 마법진을 그려 손을 탁하고 치는 놀이가 유행했으니, 그 인기는 하나하나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강철의 연금술사>는 많은 사람에게 연금술사라는 특이한 직업군을 알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연금술사의 꿈을 꾸게 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꼭 이 만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어렸을 적 우리는 모두 연금술사였다. 필자는 아직도 6살 때 친구들과 땅에 마법진을 그리면서 날씨를 조종하는 놀이를 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 필자는 긴 나무 막대기와 긴 망토만 가지고도 번개를 조종하는 사악한 마법사를 소환할 수 있었다. 필자는 마법사인 동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인터넷 게임이 발달한 오늘날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필자뿐만 아니라, 어렸던 우리가 모두 그랬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그 마법적인 힘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무언가 해내고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이 만화나 상상력을 '철없는 것'으로 미뤄두고, 그 빈 부분에 새로운 것을 부어 넣었다. 그 과정은 늘 '성숙'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필자를 포함해 많은 친구가 성숙해졌다. 완벽한 어른이 되어 오랜만에 만난 소꿉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취업과 직장에 대해서 말할 때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 더는 7대 대마법사 회의는 열리지 않겠구나.' 오늘 필자는 우리의 '잃어버린 마법적 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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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 hermetis. 헤르메스의 그릇이라는 뜻이다. 헤르메스의 그릇은 금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다. 연금술사들은 헤르메스의 그릇에 납을 담고 잘 닫은 뒤 열을 가하면 그릇 안에 담긴 납이 화학변화를 일으켜 금으로 변한다고 믿었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헤르메스의 그릇에서 영감을 받아 '테메노스'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테메노스는 고대에 희생 제의가 치러지던 신성한 공간으로, 융은 개인의 내면에도 자기의 경험과 갈등을 담아두는 심리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음속에 있는 테메노스의 그릇은 자신의 경험과 갈등을 내면에서 변화시키고 숙성시킨다. 그 결과로 금이 만들어진다. 분석심리학에서 제안된 테메노스의 그릇은 심리치료 현장에서도 적용된다. 상담자는 치료자의 테메노스가 잘 밀봉되도록 돕는다. 그 안에서 엉킨 수많은 감정은 마침내 빛나는 금이 된다.

언어를 매개로 심리치료를 진행하는 심리상담도 잘 밀봉된 테메노스를 제공하지만, 놀이나 개인 안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매개로 끌어들여 온 심리치료 분야가 있다. 바로 분석심리학 계통의 놀이치료나 표현예술치료다. 치료현장에서 사람들은 안전한 테메노스에서 자신 안의 이미지를 놀이를 통해 풀어낸다. 아이를 잃고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위로받지 못한 어머니가 모래사장에 야만인과 동물들을 놓고 그들이 싸우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나, 왕따를 당했던 아이가 호랑이 가면을 쓰고 소리를 치고 다닌 후 심리적인 부적응을 감소시킨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억압되고 소화하지 못한 상처나 자신은 개인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테메노스 안에서 재구성된다. 그리고 다시 열어본 그 자리에는 황금이 남는다. 개인이 안에 품고 있었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재구성하는 테메노스의 놀이는 일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그 안에서 위대한 변화를 거친다. 필자가 반복해서 말하는 황금은 더 '나다운' 자기 자신을 말한다. 특별한 심리적 부적응을 앓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아직 발견해내지 못했거나 통합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활발한 청년 안의 얌전한 공주님이나, 무뚝뚝한 소녀 안의 발랄한 요정님처럼 말이다. 이처럼 테메노스를 활용한 놀이는 성장을 낳는다.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가 되는 RPG 게임에 쉽게 매료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스탠리 페러블>이라는 게임에서 지적했듯이, 게임은 불완전한 자유를 약속한다. 정해진 선택지가 존재하는 게임은 결코 개개인의 테메노스를 충족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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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에 열린 TRPG 플레이 데이의 플레이 모습


아마 이 글을 보는 많은 사람이 TRPG라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초여명과 TRPG클럽의 크라우드 펀딩으로 시장이 커지긴 했지만, 아직 '상상 놀이'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TRPG는 익숙한 문화가 아니다. TRPG란 테이블에서 이루어지는 역할 놀이다. 사람들은 테이블 위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 가상의 목표를 달성한다. 일반적인 컴퓨터 게임과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주사위와 필기구, 필요하다면 지도와 피규어를 가지고 게임을 진행한다. 주사위의 확률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나누고, 가상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 플레이어는 게임 마스터(GM)로서 플레이어가 통제하지 못하는 캐릭터의 요소와 행동에 대한 제한을 가한다. 그는 시나리오의 진행자이자 심판, 조력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RPG를 사람의 힘으로만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외부인의 관점에서 볼 때 TRPG는 역할놀이일 뿐이지만, 게임에서 경험한 감정, 동지애, 성취는 현실적이다(Adams, 2013),  이미 외국의 연구는 TRPG가 언어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게임으로서 학생들의 사회화 기술에 분명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Hawking-Robinson,2011) 이렇듯 외국에서는 이미 TRPG라는 오락문화가 새로운 대안으로서 떠오르고 있다.

적은 게임 도구가 제공하는 상상의 세계는 앞서 말한 테메노스의 장이 되기 쉽다. TRPG라는 틀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TRPG는 많은 세계와 많은 주인공의 모습을 경험하게 한다.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의 특성상 개인 안에만 존재했던 테메노스는 보다 현실성을 갖는다. 개인의 창조성에서 탄생하고, 주변 플레이어를 통해 확장해나간다. 필자는 20대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TRPG가 제공하는 테메노스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연기하고 세상을 탐사할 수 있었다. 자연을 자유롭게 탐험하는 선한 엘프가 되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성차별의 현실을 견디는 여성 전투기 비행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거대한 악당을 쓰러트리고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연인과 친구를 잃어 복수심에 불타 적군의 비행기에 폭탄을 안고 달려갈 수도 있다. 이 판타지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울고 웃는 과정은 오락이라는 안전한 테메노스 안에서 또 다른 자아를 찾는 여정이 된다. 정신 차리고 보니 마법을 부리지 못하게 된 많은 사람에게 테메노스의 오락, TRPG를 추천한다.





참고 및 출처
Paulino, Marinela Y. Cuason, Sherwin U,(2017) Role to Play: Examining the Player Experiences of Dungeons & Dragons
Adams, Aubrie S. (2013). Needs Met Through Role-Playing Games: A Fantasy Theme Analysis of Dungeons & Dragons. Kaleidoscope: Vol. 12.
Hawkes-Robinson, W. (2011). Role-Playing Games Used as Educational and Therapeutic Tools for Youth and Adults. Retrieved from www.academia.edu/3668971/Role-
playing Games Used as Educational and Therapeutic Tool for Youth and Ad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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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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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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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enie
    • 안녕하세요, 에디터 12기 박진희입니다.

      에디터님 글 잘 읽었습니다.

      좋았던 점을 꼽자면, 먼저 글의 전체적인 구성이 돋보였습니다. 낯선 주제였지만, 에디터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친숙함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에서부터 심리학적, 사회학적 기능으로까지 이야기의 범위가 확대되는데, 모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완성도 있는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TRPG라는 소재를 다양한 시각에서 다룬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금술, 테메노스 등의 이야기를 TRPG와 엮어낸 점이 흥미로웠고, 유익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낯선 소재를 깊이 있게 다루다 보니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TRPG를 소개하는 글임에도 TRPG가 구체적으로 와닿지는 못했는데, 게임 방식을 동영상, 사진 등으로 소개한다면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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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
    • 안녕하세요, 11기 에디터 최서영입니다.

      우선 제가 요즘 흥미롭게 구상하던 주제와 맞닿아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제 생각 속에서만 머무르던 일에 '테메노스의 오락', 'TPRG'라는 이름이 생겨서 앞으로 생각을 더욱 키워나가는 것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도입, 경험과 사례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셔서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었기에 에디터님의 다른 글 또한 궁금해지고, 이 주제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싶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안할 만한 점이 있다면 글 자체는 매우 흥미로우나 직관적으로 읽기엔 조금 어렵다고 느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부분에는 볼드체를 사용하거나 관련 자료를 함께 보여주신다면 더욱 좋은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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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
    • 2017.12.04 01: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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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그리고 덧붙이자면 저는 철학과에 재학 중이고 현재 철학교재를 제작하는 과제를 진행 중입니다. 혹시 에디터님이 괜찮으시다면 출처를 표기하고, 이 글의 일부를 활용해도 괜찮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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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2017.12.04 18: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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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_ziro누군가에게 작은 영감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만큼 글쓰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저야 감사할따름이죠 ㅎㅎ 비슷하면서 다른 시선,앞으로도 에디터님의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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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
    • 12기 에디터 강범석입니다.

      먼저 진주님의 글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자신만의 환상 공간, 숨겨진 도피처라고도 볼 수 있을 테메노스와 그것을 한껏 발현할 수 있는 TRPG까지 제 생각의 층계가 한층 두터워진 것 같아 기쁩니다. 동심의 세계를 유독 좋아하는 저로서는 서문의 마지막, 우리들의 잃어버린 마법적 힘이라는 구절이 몹시 슬프게 읽혔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부터 사는 것이 바빠 하루하루 급급히만 흘려보내고 있었으니까요. 이 글을 통해 제 안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을 테메노스의 흔적을 찾아보려 합니다.
      다만 제가 이 댓글을 쓰는 중에도 실은 테메노스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긴가민가합니다. 개념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한 듯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잃어버린 마법적 힘에 관련하여 설명을 해주신다면 이해가 쉬워질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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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hbsky
    • 11기 에디터 이현빈입니다.

      우선 '테메노스'라는 생소한 개념을, 비유와 예시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하신게 좋았습니다. 글 전체를 감싸는 이 개념이 잘 설명되어서, 글이 모호하지 않고 주제를 잘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테메노스라는 개념에서 TRPG라는 개념으로 매우 매끄럽게 연결된다고 느껴집니다! 다소 추상적일수도 있는 단어들이 잘 설명됨으로서, 매우 완성도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TRPG가 주제인 글이기에, 그것에 관련해서 더 비중을 늘렸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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