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감각10. 수학자의 언어가 된 시, 시인의 눈이 된 수학

글 입력 2017.11.28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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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언어가 된 시, 시인의 눈이 된 수학



  수포자였다. 고등학생 때 말이다. 음, 어쩌면 적어도 나에 한해서는 포기, 라는 말보다 정확한 표현이 '수혐자'일지도 모르겠다. 수학혐오자. 변명이 필요한 부분인데, 학문으로서의 수학이 싫었던 건 아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우주적 상상력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어서 자연과학에 대한 꽤나 큰 동경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와 빛, 별, 파동, 에너지, 사물, 운동, 수렴과 확장. 얼마나 멋진 단어들인가. 내가 '혐오'의 감정을 품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과의 불화부터 시작해서 학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 등등. 설명하자면 너무 너무 길고 귀찮고,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얘기는 아닐 것 같으므로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다' 정도로 일축하겠다.
  
  그러나 어쨌든, '수학'과 관련된 얘기를 나는 지금 시작해야겠다는 거다.
  
  수학이랑 친하지도 않았다면서 무슨 수학 얘기를 제대로 하겠다는 거지? 라는 당신의 의문을 잠재울 능력은 없다. 왜냐면 난 이제 수혐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심각한 수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나는 내 모름을 말할 권리가 있다. 알지 못함을 발화하고 동경을 설명하는 것. 그때의 기분은 마치 막연한 미래나 꿈에 대한 얘기를 하는 느낌과 비슷하다. (이것만으로도 내게 이제 수학에 대한 혐오가 남아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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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심정적 동요를 크게 일으킨 책이 하나 있다. 함기석의 산문집 <고독한 대화>를 마침내 끝까지 읽어버렸고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시인이자 수학자인 사람의 글이다. 우선, 나의 지지부진한 설명은 뒤로 하고, 책 속 한 대목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 이 책의 구매로 이끌었던 대목이다.


  시인은 위험한 폭약이다. 자신을 터트려 망각된 시간, 망각된 감각, 망각된 잠을 깨우는 폭약이다. 시인은 콘크리트처럼 굳은 일상을 파괴하려는 위험물질들이다. 벼랑 위에서 폭포가 흰 벚꽃처럼 떨어지고 있다. 자신의 아집과 맹목, 편견과 통념을 송두리째 벼랑 아래로 내던지는 저 폭포가 시인이다. 시인은 자신의 일생을 죽음 쪽으로 던져 삶에 닿으려는 격렬한 폭포다. 현실의 폐허 속으로 자신을 내던져 악惡의 세계를 역류하는 폭포다. 반역의 연어들이다. 일상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동안 시인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세계의 무사와 안일을 부정하며 역류한다. 시인은 어둠에 휩싸인 바다를 응시하며 미래에서 불어 닥칠 태풍과 해일을 예감하는 자고 시대의 폐허 속에서 폐허의 진실을 밝히는 등대다. 그 격랑의 바다에서 시인은 언어의 그물로 세계를 포획하는 어부다. 그러나 그가 그물을 올릴 때 포획한 것의 수만 배에 달하는 것들이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다. 시인은 이 언어의 허망과 절망을 제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 한 송이 꽃으로 개화開花시키는 자이다.

_148 「시인」 전문


  너무 멋진 글이지 않은가. 나는 구매를 결정할 때까지도 이 시인이 수학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의 시집을 어디서 구경해 본 적도 없다. 사실, 이런 시인이 있는지도 몰랐다. 김경주의 <밀어>처럼 시적인 산문이 또 뭐가 있을까 검색하고 찾다보니 알게 된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가 ‘수학자’의 눈으로 ‘문학’과 ‘현실’의 경계를 해체시킨 글들을 읽고 나서야, 저자 정보를 확인해본 후에야 그가 수학자라는 것을 인지했다. 벼랑 위에서 폭포가 흰 벚꽃처럼 떨어지고 있다, 라고 말하는 수학자라니. 자신의 아집과 맹목, 편견과 통념을 송두리째 벼랑 아래로 내던지는 저 폭포가 시인이다, 라고 시인의 숙명을 선고하는 수학자라니. 다른 새로운 대목을 보여주겠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 내가 느낀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어쩌면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과 ∞은 일란성 쌍둥이다. 인간의 등과 배, 남극과 북극처럼 대극對極의 위치에서 상생하며 생멸生滅에 관여한다. 또한 0과 ∞은 서로에게 역설과 반어의 존재이면서, 공동의 생식生殖에 관여하는 기이한 부부다. 0과 ∞의 관계는 곧 무無와 무한, 공空과 영원永遠의 관계이며 세계의 존재와 부재에 관여하고 인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기저에너지로 작동한다. 인류의 역사는 0의 발견과 수용으로부터 급진적 발전을 이루었고 과학과 문명의 변화, 철학과 종교의 심층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0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시간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 0은 거부와 부정의 대상이었고, 이단아의 운명 속에서 인간에게 반인간적 존재였다.

  나는 0을 논리를 부정하여 논리를 초월하는 상승에너지를 내장한 반물질로 생각하곤 한다. 나는 세계의 존재 양식을 다음과 같이 약호화한 적이 있다. (-∞)……反物反物反物反物反物……(0)……物物物物物物物物……(∞). 이 기호의 나열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시각적으로 기호화된 부분이 아니라 비非시각화된 무수한 공백이다. 그곳에 멸절된 시간, 멸절된 하늘과 땅, 멸절된 사물들, 멸절된 인간들, 멸절된 음악과 춤, 멸절된 꿈과 비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틈에서 울려나오는 무수한 울음과 탄식을 보고 듣고 실감으로 느낀다. 0은 플러스(+) 세계 내 존재의 물物인 내게 마이너스(-) 세계 내의 타자들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다리이자 터널이다. 0은 내게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존재와 부재를 하나의 육체로 인식케 하는 무형無形의 시공간 터널이다.

  오늘은 10월 0일이다. 나는 지금 하늘 이편에서 텅 빈 공중을 바라보고 있다. 공중으로 0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0마리의 새들이 떼를 지어 무한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새가 없는 것과 새가 0마리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0의 개념의 있고 없음의 차이가 문장 진술의 변화를 가져오고, 없는 대상에 대한 기호의 역할 변화를 가져온다. 0이 부재하면 문장이 부재하고, 의미는 무한대로 확장되지 못한다. 0이라는 공空의 존재가 물物을 물로서 존재하게 하므로, 0은 텅 비어 있지만 역설적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한 변화를 촉발하는 운동에너지로 꽉 차 있다. 0은 지움, 연속, 망각, 순환을 상징하는 하나의 거대한 수레바퀴다. 0에는 혼돈과 어둠, 태초의 우주와 원초적 공포가 들어 있다. 0에는 위험한 공격 본능, 전복성과 냉혹성을 숨긴 태고의 야수가 숨어 있다. 시에 대한 제로(0) 시계時計/視界가 필요하다.

_61 「0(零)과 ∞(無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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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과 ∞에 대한 시적 고찰이라니. 과학계에서 우주 공간을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에너지’라고 인식한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만큼의 충격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암흑에너지’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나는 그 단어가 굉장히 마법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깜깜하다고 여기고 어둡다 여기고 없다, 라고 말해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이들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시선을 두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운동을, 운동의 가능성을 치밀하게 추격하는 태도. 그러나 사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자세는 시인에게도 있다. 시인이 세계를 들여다보는 방식도 수학자의 방식과 흡사하다. 시인이라면 절대로 어둠을 단지 어둠, 이라고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어둠, 이라고 텍스트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어둠을 지칭하는 게 아닐 가능성이 높다. ‘부재’를 부재로 여기지 않는 태도. 부재를 ‘존재’로 여기고 그 존재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감정과 상상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은 단지 '시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 이 책은 언어가 피를 토하고 우주를 날고 파티를 열고 풀밭을 뒹굴고 서로 부둥켜안아 키스를 하는 최전선을 시인이자 수학자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즉, 이 책은 시인이 자신의 작품 속 ‘시어(詩語)’들의 양상과 시적 세계의 운동을 수학자의 안경을 쓰고 만져서 작업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시인의 말’로 표현해도 보통의 사람들은 충분히 낯설고 생경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인의 말’을 다시 ‘수학자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세계는 새로운 각도로 굴절되어 우리의 시야 속에 신세계를 던져놓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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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수학. 나란히 놓이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신선하다. 우리는 이질적인 사유가 서로 결속하고 타협하고 합창할 때의 감동을 알고 있다. 아주 진부한 깨달음이지만 ‘서로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실감하고 체감하는 단계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시’는 수학자의 언어 속에서도 완전한 시일 수 있고, ‘수학’ 역시 시인의 눈 속에서 수학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 혼자서 이중창을 하듯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저자가 부럽다. 그의 표현력도 부럽지만, 더 부러운 것은 그의 예술적 감도(感度)가 두 가지 형태로 발달되어 있을 거라는 점이다. 겹겹으로 그리고 양 갈래로, 층층으로 이 세계를 보고 느낄 수 있다니.
  
  산문집이었지만 여러 편의 산문시들을 읽었다고 해도 내 감상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함기석 시인의 시집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시집’이라고 칭할 수 있는 책에 또 어떤 예술적인 수학이 있을지, 얼마나 수학적인 시가 있을지 어서 확인해 보고 싶다. 물론, 나의 수포심(心)은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쉽게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내 그랬듯이 이 동경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보다 더 들끓지도 모르지.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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