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취향의 역사 [음악]

얕고 깊고 넓고 좁고 익숙하고 낯설고 기억하고 잊혀지고
글 입력 2017.11.2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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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향이라는 걸 인지한 게 언제였더라. 한 우물만 파던 유년기가 무색하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모든 것에서 호불호가 사라졌다. 문제는 뚜렷한 '호'도 함께 사라졌다는 점이다. 크레파스에서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제일 좋아하는 만화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이 의문이었다. 다 좋은 걸. 다 좋으니까 색칠도 알록달록 골고루 하고, TV 만화도 모조리 다 섭렵하지.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어보는 날에는 애들이 제일 많이 말하는 걸 따라 말했다. "음, 저는 계란이 제일 좋고, 시금치가 제일 싫어요..." 거짓말하느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으면 선생님은 "싫어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니 주눅들 필요 없어요."라며 편식한다는 아이를 상냥하게 위로하셨다. 그러면 더 큰 죄책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사실 시금치 곧잘 먹는데. 그 때부터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사소한 것이라도 취향을 가져야 대화하기 편하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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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을 따라 아무거나 대답하던 어린이에게 5살 터울의 큰언니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모름지기 어리고 미성숙한 인격은 보다 성숙한 가까운 지성체를 모방하며 성장하지 않는가. 그 모방에 어찌 보면 부모님보다도 더 큰 파급력을 가졌던 사람이 바로 큰언니였다.

  언니는 팝송을 좋아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을 틀어놓고, cd를 모으는 언니의 옆에서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가요보다 팝송을 좋아하게 되었다. 큰언니는 책도 즐겨 읽었다. 학교에만 가도 책이 가득했고, 집에도 부모님이 전집으로 잔뜩 사놓으신 책이 한 벽을 꽉 채울 정도였지만 본격적으로 책 읽는 습관을 들이게 된 건 독서하던 큰언니를 흉내 내면서부터였다. 그중 오늘 얘기하려는 건 음악이다.

  인기차트에서 좋은 노래만 골라 반복 재생하던 초등시절을 지나, 중고등학교 때는 마치 심마니의 자세로 평생 안고 갈 아티스트들을 찾아듣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들, 그러니까 책으로 치면 '세계문학전집'을 정독하는 자세로 비틀스, 엘튼 존, 제니 조플린, 머라이어 캐리, 오아시스, 롤링스톤즈, 퀸 등을 섭렵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노래 한 곡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낸 앨범 전곡을 차례대로 듣고, 그들의 생애와 가치관 등을 파고들고, 어떤 상황에서 이 앨범을 냈는지 노래의 배경까지 집중했다.

  훗날 서양음악사 교양시간에 클래식 한 곡을 이해하기 위해 작곡가의 생애, 성격, 시대적 배경까지 모두 훑는 걸 보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수업을 통한 학문적인 분석과 배움의 시간이 내 덕질의 알고리즘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게 인간의 본능적인 학습욕구의 유사성인지, 전 세계 덕후의 공통된 습성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모방을 통해 내 취향의 기반이 닦였다. 세상을 접하면 접할수록 취향은 주체성을 갖게 되었다. 여전히 팝을 좋아하긴 했지만 더 이상 큰언니가 사다 놓은 cd에 의존하지 않았다. 혼자 열심히 뒤적이다가 끝내주게 좋은 노래나 가수를 찾는 순간이면 엄청난 기쁨으로 춤을 췄다. 그렇게 쌓인 애장곡 리스트는 어른이 된 지금, 큰언니의 것과는 동떨어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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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재즈를 제일 좋아한다. 몇 문단을 할애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언니의 영향 없이 온전히 스스로 일궈낸 취향이 바로 재즈다. 그렇게 돌고 돌아 현재까지 최종적으로 정착한 장르이기도 하다. 가요, 팝송 중에서도 유난히 소울음악에 정이 가더라니, 본격적으로 재즈에 빠져들었던 순간 나는 이곳에 뼈를 묻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였다. 요즘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앞다투어 재즈를 틀어대는 모습이 반가운 이유다.

  재즈의 역사, 재즈의 스킬, 재즈 가수들. 부흥의 시작부터 훑어내려오는 관습적인 버릇 때문에, 처음 접했던 초창기 재즈가수들에 현혹되어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컬러보다는 흑백 영상이 흔할 정도로 옛날 노래지만 그게 그렇게 좋다. 그때 당시 잘 나간 가수들은 기본 몇 백곡씩 녹음하고 남겨놓은 덕분에 나는 마르지 않는 우물물을 마시는 기분으로 아직도 열심히 '고루한' 그 노래들을 찾아듣고 있다.

  요즘같이 추운 밤에 듣기 좋은 올드 재즈를 소개하며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거기까지 들어가면 글이 너무 구구절절해질듯하다. 별 수 없이 다음 글에서 겨울을 책임질 멋진 재즈곡들을 들고 돌아오겠다. 기대해주시길.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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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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