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말정리로 들쑤신 자화상의 기억 [문화전반]

글 입력 2017.12.0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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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자화상



[Opinion]
연말정리로 들쑤신 자화상의 기억


엄마는 앨범 안을 정리하기를 꺼리셨다. 내가 물어보면 늘 엄마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성실한 엄마는 청소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지만, 유난히 앨범이나 당신이 쓰셨던 일기를 잘 정리하시지는 못했다. 어린 나는 어렴풋이 엄마가 '청소'가 아니라 '정리'를 꺼리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책장 속에서 모든 책이 일렬종대로 줄을 선 것처럼 완벽했는데, 가장 낡은 곳에 있는 엄마의 앨범은 꽂혀있을 뿐 정리가 잘 되어있지 않았다. 얼마 전 엄마의 개인 앨범을 열었다. 엄마의 앨범은 그 사진을 넣었을 때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꽉 채우겠다는 욕심에 이것저것 가득한 앨범은 무질서하고 먼지가 일어났다. 엄마가 지나가다가 내가 앨범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웃었지만, 활짝 웃는 얼굴에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의 얼굴에 과거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나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건 마치 매일같이 타왔지만 더는 탈 이유가 없어 잊어왔던 기차역의 폐역 소식을 들은 것처럼, 그래서 언제고 그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지만, 그 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표정이었다.

어제는 엄마가 그때 지었던 표정이 도저히 잊히질 않았다. 나는 어제 10년 된 타블렛을 정리했다. 더는 선도 그어지지 않는 타블렛을 정리하다 보니 내가 그린 그림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린 그림들은 모두 잘 인쇄해서 파일에 넣어두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만들었던 파일을 언제 놓았는지도 모를 높은 위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나보다 조금 큰 서재의 모서리에 앉은 먼지를 털었다. 한번 털 때마다 태양에 튀는 작은 불빛처럼 표면을 맴돌았다. 나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먼지가 왠지 따갑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서재 전체를 치우게 되면서 하얀 걸레가 회색빛이 될 때쯤에야 문을 열어서 공기를 환기할 수 있었다. 창문을 여니 겨울인데도 눈으로 아픈 햇살이 쏘여졌다. 창밖을 보니 겨울에도 무성한 초록 잎이 보였다. 나는 그 초록빛을 신경 썼다.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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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삼학년, 환상적인 환상


문득 내가 여기에 청소를 하러 오기까지 삼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물 한 살까지도 타블렛을 사용하고 앨범을 놓았던 것 같은데, 벌써 햇수를 생각해보니 처음 사용 기간으로부터 10년이 지나있었다. 서재의 안쪽을 청소하는 것은 서재의 표면보다 더 지긋지긋하고 끈질긴 일이다. 이때부터는 내가 당시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더듬게 했다. 서재 안에서 나온 앨범은 모난 모서리를 여덟 개나 가지고 있었다. 나는 앞표지를 한번 쓸어내리고 걸레로 눌러 닦았다. 앨범을 닦은 다음에는 분류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유년 시절의 나, 친구들, 시간, 사건, 예민했던 기질, 불안, 외상후스트레스, 불타올랐던 절망. 사진에조차 찍히고 싶지 않았던 나는 수많은 그림으로 그걸 표현했다.

그때는 참 그림을 그릴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그 나머지 삶 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그린 모든 그림이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입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고통으로 깊게 팬 상처의 인식은 치유를 담보하지 않았다. 첨예한 인식도 그 자체로 치유를 대신 할 수는 없었다. 그림으로 도망가려고 했던 나를 앨범을 창고로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손에 뭔가 더러운 것이 많이 묻어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고 불안이 덕지덕지 묻은 손을 씻어낸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큼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지나 간다. 머리카락이 조금 낀 하수구 사이로 시간이 지나간다. 그렇게 정리를 반 정도 끝냈고,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 늘 더 좋은 방향이었지만 나는 이제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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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 그림일기


창문 밖을 다시 본다. 이 겨울에도 초록빛이 무성해 나무 사이에서 새로운 가지가 솟아오른다는 상상을 한다. 나무 밑에는 떨어진 가지들이 좀 있었다. 그것들은 한때 나무를 구성했지만, 이제는 양분이 될 것이다. 그것들은 내가 떨어뜨린 가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순식간에 내 세상을 바꾸고 사라진 것들, 푸른 살을 찾아 헤매던 나를 안아준 망상과, 마비된 팔을 깃발처럼 펄럭이던 감수성. 인생이란 종착도 출발도 없는 더러운 여행일 뿐이라고 믿고 얼어붙은 내 옛날의 문장들과, 그러던 와중에도 말라붙은 수액 속에서 웅크렸다가 하얗게 차오르던 삶의 의지 같은 것들. 그것들은 이제 햇빛들을 모아 만든 꽃다발을 나에게 안기고 사라졌다. 나는 나머지를 치우려고 몸을 일으킨다. 문장을 끝낸다. 언젠가는 다시 열어볼 나를 기대한다.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정리하는 시간이 너무 흘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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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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