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984', 오래된 미래의 섬뜩함 [공연예술]

글 입력 2017.12.04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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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1984>를 보고 왔다. 연극이 끝난 후에 공연장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이번 달 오피니언 이걸로 써야지!’ 그리고 ‘또 봐야지!’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극이다.

  나는 공연이나 문학작품이나 어쨌든 어떠한 콘텐츠를 접할 때에 제목에 많이 좌지우지되는 편이다. <1984>는 사실 원작 또한 매우 유명하지만 나는 ‘유명한 원작’이라던가 ‘국립극단의 작품’이라는 어떠한 타이틀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그저 <1984>라는 네 숫자가 주는 투박함에 이끌려 공연장을 찾게 된 것 같다. 그 네 숫자가 주는 느낌이란 내가 어렴풋이 간접적으로만 접해온 시대에 대한 막연함과 호기심이었다.

  <1984>를 보고 온 후에 느끼는 바로는 결코 대중에게 순수한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확연하게 사람에게 불편한 감정을 전달하는 이 작품은 그 강렬한 흔들림 때문에, 그 새로움과 의미 때문에 사랑 받는 것이지 그 작품 자체가 사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 원작이 있는 작품을 공연으로 접한다는 것은 문자를 읽는 행위와 달리 공연이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특성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이 레포트에서 <1984>의 작품 그 자체에 대해서도 다룰 것이지만, 더욱이 공연이기 때문에 더욱 도드라지는 점들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어보려고 한다.
 
 

작품에 대하여

  이 작품은 1948년 조지 오웰이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 필독도서라는 이유로 <1984>를 읽게 되었는데, 18살이라는 나이는 성숙하다면 성숙하지만 어리기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나는 책을 덮을 즈음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더랬다. 당시에는 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책이 왜 필독도서인지에 대한 답답함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었다. 지금의 나는 그로부터 겨우 몇 년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 때보다야 조금은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 것 같다고 느낀다.

  이 책은 오웰이 36년 뒤의 미래를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이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었던 ‘미래’란 오랜 시간 뒤의 일인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상당히 오래된 시간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그리는 미래란 현재보다 희망적이거나 이상적인 시간을 이야기하는 데에 비해, 오웰의 작품 속 미래는 그의 시대보다 암담한, 피폐한, 고립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1984>의 프로그램 북에서 ‘오래된 미래’라는 어휘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나는 이 말이 조지 오웰의 1984년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1984년은 그에게는 미래였지만 그가 그린 모습은 과거만치 오래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1984년은 ‘당’이라고 불리는 지배세력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이다. 국민들의 사상은 억압당하고, 감시당하고, 세뇌당하며 기억은 조작당하고 과거는 끊임없이 지워진다. 듣기만 해도 답답한 이 상황을 통해서 오웰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색을 하게하고 과거부터 현재, 미래의 특성에 대해서 탐구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7년에서 바라보았을 때, 1984년은 이미 오래된 과거이지만, 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서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날까지도 염두하고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국립극단에서 올린 이번 공연은 원작을 그대로 무대화한 것이 아닌 각색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이 연극 또한 또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까지 유효한 메시지가 이 연극에서 전하는 메시지 외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는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저마다 1984년의 오래된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무대구조에 대하여

  공연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관객에게 보이는 것은 바로 무대구조이다. <1984>의 무대구조는 컨테이너 박스와 같은 네모 형태의 구조물 때문에 무대라는 커다란 공간이 조각조각 나누어져 보인다. 이 공간은 원작이 가진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보다는 다층의 연기공간을 구성하는 집중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공간을 나누는 것이 또한 해체된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키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조각나고, 분해되고, 분리된 공간에 서 있는 배우들이 아득하게 먼 곳에 동떨어져 있는 듯 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외를 보여주는 이 작품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시각을 통해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무대구조, 박스들은 모두 철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나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공간의 은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일기를 쓰는 주인공의 모습은 철망 사이사이로 보여졌고 때문에 보일 듯 말 듯 한 그 공간의 협소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렇듯 답답한 느낌을 주는 철망에 사용된 철이라는 소재는 감성이 배제당한 황량한 인간세계의 느낌을 강조한다고 한다. 철망이 주는 느낌과 그 소재가 주는 느낌이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치밀하게 계획된 무대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디자인과 구조물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회색 일색인 데에 비해 가끔씩 무대에 비추어지는 빛은 작지만 흐릿하지 않고 밝다. 이를 통해서 구조물의 내부가 가끔씩 보이는데 이는 감시의 눈길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인간 내부에 깃들어 있는 잠재적 빅브라더의 존재를 감지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사실 연극을 관람하면서 이러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했지만 이렇듯 비추어지는 빛은 관객에게 편안한 인상으로 여겨진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일반적으로 어둠과 대비된 빛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따듯하거나 편안한 인상을 주는데 이 연극에서 장치로서 사용된 빛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인상을 주었다. 윈스턴(주인공)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때문에 감시당하지 않고 억압당하지 않는 어둠 속에 있기를 바라는 데에 반해서 빛은 그의 존재를 계속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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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연기에 대하여

  내가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된 장면을 꼽자면 세 신을 들 수 있겠다. 제일 먼저는 윈스턴과 줄리아가 비밀장소에서 만나 관계를 가지는 신이다. 그 장면에서 나는 성욕을 포함하여 모든 욕구를 봉인당한 사람이 그 억압을 털어버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의, 다시 말해 순수하게 현재의 존재로서 있게 되었을 때의 그 희열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육체와 정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고, 육체의 본능을 통해서 당에게 당해온 정신적 세뇌가 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관계를 통해서 더욱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 그 장면에서 그 둘이 주고받는 대화, ‘난 살아있어, 난 존재해!’, ‘내가 지금 빅브라더(당의 최고 권력자)를 죽였어’와 같은 대사들이 마음에 너무나 빠르게 날아와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배우들이 그 인물의 벅찬 순간과 그 때의 감정을 표현한 달뜬 목소리, 움직임과 말투 하나하나는 그들의 관계가 단순히 성욕, 그 이상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신은 ‘2분 증오’라고 불리는 국민들의 의식과 같은 것이다. 이 때 당의 국민들은 반역자라 불리는 ‘골드스타인’에 대하여 2분 동안 증오의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은 단순히 표출이라고 하기에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진하고 무겁고 빽빽한 감정들의 연속이었다. 배우들은 손을 갈퀴처럼 구부려 벽을 긁기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으며 동물처럼 뛰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려 얼굴 근육이 뭉쳐진 것처럼 보이곤 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었고 그로테스크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는 책에서 읽었던 ‘아우성친다’는 단어 하나로는 받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공연이기에, 실체적인 사람인 배우들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공기의 진동을 받을 수 있기에 더욱 첨예하게 다가오는 감정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윈스턴이 당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신이었다. 이 장면은 이 작품 안에서 나 뿐만이 아닌 다른 많은 관객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는 장면이었던 것 같다. 윈스턴은 쥐를 무서워하는데 당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 앉혀놓고 그의 눈앞에 쥐가 담긴 철장을 놓아 쥐가 그를 향해 오거나 돌아다니거나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때의 끔찍함과 잔인함이 그대로 기억나 몸서리가 쳐지는 것 같다. 윈스턴은 쥐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진저리를 치며 제발 쥐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그의 머릿속에 쥐가 연상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런 그에게 연상하는 것을 넘어 실체적인 쥐를 보여주고 듣게 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고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쥐를 상당히 싫어하고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이때의 내가 정말 내가 고문당하는 것처럼 강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을 느낀 것은 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윈스턴 역의 배우가 하는 연기 그 자체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우선 고문당하는 자로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내지르는 비명과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힘이 주어지는 몸 때문에도 그랬지만, 윈스턴 자신 대신에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은 꿈을 꾸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윈스턴이 아는 모든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신뢰와 모든 것을 나누었던 줄리아에게 이 고문을 행하라고 외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혼란을 안겨주었고 인간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장면에서의 연기는 정말 지켜보고 있기가, 그리고 그 자리에 관객이지만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이 괴로운 것이었다.
 




  이제 무대구조도, 연기도, 작품 자체의 스토리에 대해서도 아닌 그저 이 연극을 본 후에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기억에 남은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첫째로는 스크린의 활용이다. 극 중 윈스턴이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할 때에 구조물인 박스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커다랗게 비추어진다. 그 때 관객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윈스턴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데, 그 때 전해지는 감정은 마치 윈스턴의 죄책감을 대신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눈에 비추어지는 애처로움과 소리 없는 흐느낌을 대신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복합적인 감정이 갑자기 전해졌기 때문에 정말 갑자기 소름이 돋고는 했던 것이다. 스크린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관객에게 이런 생각과 감정을 전해주다니 훌륭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무인화에 대한 연출이었다. 무인화란 <1984> 내에서 당의 국가체계와 신념에 반하는 인물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삭제하여 역사 속에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극 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무인화의 대상이 된 것을 암시하는데 그 중 내가 신선하게 충격을 받은 것은 윈스턴의 동료 사임의 무인화였다. 윈스턴과 사임과 파슨스는 자주 대화를 하는데, 어느 날 사임이 무인화 된 이후에도 파슨스는 윈스턴에게 사임이 있었을 때 했던 똑같은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대화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관객을 포함하여 윈스턴과 파슨스 모두가 사임이 무인화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며 그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그가 있었던 순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꺼내는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이 부품이나 사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느껴졌었다.

  세 번째로는 액자식 구성이었다. 극 초반에서는 1984년보다 이후의, 미래 시대의 어느 북클럽에서 한 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은 허구인가, 진실인가에 대해서이다. 여기서 이들이 이야기하는 책의 내용이 바로 1984년의 오래된 미래인데, 나는 연극 내에서 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이러한 구성이 확실하지 않고 모호한 연극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프로그램 북을 읽어보니 이 또한 연출의 의도적인 장치로, 관객에게 ‘이중사고’를 하는 인물의 다중성을 보여주고 인물의 대사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도록 하는, 다시 말해 인물의 ‘이중사고’를 관객에게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모호함이 연극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하고, 때문에 더욱 확장된 의미를 찾게 한다는 것이다. 모호함과 불분명을 지금껏 축소의 의미로만 생각해왔던 나에게는 매우 새로운 발상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통해 피폐한 사회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현재 우리의 삶 속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텔레스크린이라는 기술은 CCTV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자유롭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지만, 그 정보가 ‘정말 믿을만한가’에 대해서 몇 번이고 질문한다면 그 근거를 쉽사리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극의 중후반에서 북클럽의 한 여인은 ‘정말 당이 사라진 것이겠지요? 어쩌면 우리에게 당이 사라졌다고 믿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잖아요’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대사를 듣고 난 뒤에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을 느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는 1984년의 시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어쩌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 때와 별 다름 없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깊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1984>가 나에게 던져준 전체적인 메시지와, 또 문학작품이 아닌 공연으로서 접한 <1984>에 대해 요약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에는 한 바탕 롤러코스터를 타고 온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그리고 2시간 가량의 짧은 시간 동안 너무 강렬하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공연으로서의 이 작품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의 희망적이거나, 추악했던 여러 모습, 그리고 현재 우리의 삶은 정말로 안녕하고 안정된 것이냐고 질문하는 메시지로 인해서 이 작품은 의미 있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착잡하게 하는 어두운 작품이라고 느끼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동시에 의미 있으며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곱씹으면서 느꼈던 건데, 18살의 내가 <1984>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던 것 같다. 나는 <1984>란 정말이지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음미하고 분석하고 머릿속에 각인시킬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이만치 한 작품에 대한 글을 작성했다고 해서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품을 알면 알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고 새로운 가치도 또한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의 해석인 이 연극에 그치지 않고, 더욱 많은 해석들과 시대적 상황들을 접하고 싶다. 그 과정 속에서 내 생각도 더욱 자라리라 믿는다.


[정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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