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언어, 사랑, '미르 네 글라살라' - 랭귀지 아카이브[공연]

글 입력 2017.12.08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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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 전 결

1.
세계에는 3000여 개가 넘는 언어가 있다. 그러나 매달 수십 개의 언어가 사라진다. 조지는 사라지는 언어들을 녹음하는 언어학자다. 오늘 조지가 녹음하려는 언어는 엘로웨이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생겨났다는 엘로웨이어를 녹음하기 위해 세상에 둘 밖에 남지 않은 엘로웨이어 화자를 수소문해 연구실로 초대했다. 언어학자로서 가장 기쁜 날이어야 할 텐데, 큰 문제가 있다. 아내 마리가 자신을 떠났다. 분명히 마리는 조지에게 미련이 있다. 그러나 조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지 도통 모르겠다.
 
2.
엠마는 조지의 연구실 조수다. 언어에 정신이 팔린 조지에게 실망한 마리와 달리, 엠마는 조지의 언어를 향한 열정을 사랑한다. 조지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기에 엠마는 차마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엠마에겐 조지가 좋아하는 인공언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것이 조지를 향한 최고의 사랑 표현이다. 그런데 에스페란토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 그런데 조지가 달라졌다. 눈물을 보인다. 마리가 조지를 떠났다고 한다. 완전한 슬픔에 빠진 조지 앞에서 완전한 환희에 빠진 엠마. 갑자기 에스페란토 실력이 늘기 시작한다.
   
3.
세상에 둘 뿐인 엘로웨이어 구사자 알타와 레스텐은 몇 년을 함께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부부다. 그런데 엘로웨이어를 녹음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조지의 연구실까지 와선 엘로웨이어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찌질하기까지 한 부부싸움을 영어로 술술 잘 하는 모습에 조지와 엠마는 당황스럽다. 급기야 알타와 레스텐은 엘로웨이족이 절교할 때 한다는 저주를 퍼붓는다. 조지는 인류학 사전에서 엘로웨이족이 이 저주를 하면 서로 영영 엘로웨이어로 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엘로웨이어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기 승 전 


1.
마리는 조지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게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지 못한다. 마리에게 조지는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행복한 추억은 없는 ‘슬픈 천국’이다.
 
마리는 조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붙잡히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조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사랑이 정의되지 않았는데 ‘사랑’이라는 글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조지가 표현하는 사랑은 마리의 사소한 말들을 기억하고, 그의 투정을 받아주고, 세상 그 누구보다 마리에게 모든 감정을 쏟는 자신의 행동이다.
 
조지는 마리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 대신에, 사랑한다는 말로 된 표현을 원한다는 점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마리는 조지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떠나는 끝끝내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조차 못 꺼내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침내 마리가 사랑을 끝낸다. “미안하지만, 난 한 번도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한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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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있지만 이해는 없는 ‘Sadheaven’을 떠난 마리는 ‘Joyfulhell’을 향한 기차에 올라탄다. 앞으로 마리는 조지의 사랑을 추억하며 괴로워할 거다. 조지도 평생 새로운 여인과의 사랑을 시작하지 못한다.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슬픈 천국의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조지와의 사랑은 끝났지만 마리 앞에 펼쳐진 삶은 결코 지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리는 허무한 삶을 비관해 철로에 몸을 던져 삶을 끝내려는 제빵사를 최선을 다해 설득한다. 그리고 제빵사에게서 그의 평생의 사랑이 담긴 천연 발효 액종과 그의 베이커리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어딜 가나 액종을 생각하는 제빵사에게서 액종을 향한 사랑을 배운다. 마리의 빵집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분명 지옥인데, 행복이 가득하다.
 

2.  
조지를 짝사랑하던 조수 엠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엠마는 분명 행복하다. 그러나 엠마의 사랑 표현은 기회를 잡아 사랑을 쟁취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다. 조지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마리를 붙잡으려는 조지를 도우면서 가슴 아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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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와 조지는 서로를 사랑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엠마와 조지는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절망한 조지를 따스히 안아주는 엠마는, 조지의 사랑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마리와는 다르다. 조지는 마리를 끝내 붙잡지 못했지만, 연구실을 떠나려는 엠마를 붙잡는 데엔 성공한다. 조지는 엠마에게서 마리에게선 받지 못했던 이해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뿐, 조지의 마지막 ‘사랑’은 마리뿐이다.



기 승 전 


"미르 네 글라살라"


극은 우리 언어의 불완전함을, 사랑이란 단어의 한계를 강조한다. 알타와 레스텐는 영어의 ‘love’라는 단어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의 언어 엘로웨이어는 사랑을 ‘미르 네 글라살라’, ‘날 떠나지 않길 바라요’라는 말로 표현한다. 마리와 조지, 엠마와 조지, 알타와 레스텐, 제빵사와 액종의 사랑은 ‘미르 네 글라살라’다. Love라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들의 사랑은 모두 한계에 부딪힌 새드엔딩이다. ‘미르 네 글라살라’라는 말은 이들의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뜨거운 갈망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정의한다. 엘로웨이어의 ‘미르 네 글라살라’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는 의지의 언어다. 조지와 엠마, 알타와 레스텐의 외침에 뜨거운 진심이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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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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