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부장제 속 사랑이라는 대안, 아내의 서랍

글 입력 2017.12.0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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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속 사랑이라는 대안, 아내의 서랍



1. 안녕하세요. 불만스러운 관람객입니다.

아빠랑 싸우고 나서 연극을 봤다. 아빠와 서로 밀치고 소리를 질렀는데, 무슨 큰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연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어제 엄마는 일찍 일어나서 밥까지 다 차려주고 나갔는데 아빠는 밥만 딱 다 먹고 방에 들어가서 누웠다. 나는 아빠한테 최소한 다 먹고 나서 설거지는 못 해도 식기 정도는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가 무시를 당했다. 그다음 날 아빠가 남동생이 아니라 나에게 '청소와 빨래 그리고 요리'를 요구하셨다. 엄마는 나한테 전화까지 "어차피 안 바뀌는 거 알지, 그냥 진주 네가 해라."라고 했다. 동생은 발을 다쳤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는데 불구하고 기분이 나빴다. 아빠는 누워서 누가 해주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바쁘게 공부하고 있는데, 아빠는 왜 엄마나 나한테만 이런 일을 시키고, 나는 왜 이런 작은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싶었다. 나는 툴툴거리면서 아빠에게 밥을 대접했다. 그게 기분이 나빴는지 아빠가 나랑 동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생 방에 들어와서 어지러운 방에 대해 잔소리를 하셨다. 그것도 동생이 아니라 나한테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최대한 내 의견을 부드럽게 전달했는데, 그 순간 열이 확 뻗쳤다. "왜 나한테만 그래!"라고 소리 질렀고, 아빠도 "내가 널 어떻게 먹여 살렸는데 감히 네가!"라고 소리질렀다. 아빠가 먼저 아프진 않지만 충분히 기분 나쁠 제스쳐로 손을 드셨고, 그걸 맞은 나도 아빠를 문으로 확 밀었다. 사실 이 사건 자체는 별거 아닌데 이 사건 전부터 보여줬던 아빠의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태도가 나를 더욱 화나게 했다. 생각해보면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페미니즘이 대두되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대학생인 나와 '남자의 의무'를 할머니에게 세뇌받고 그걸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머쥔 아빠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최근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나도 아빠에 대해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싶어서 보기로 한 연극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싸우기 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연극은 그때의 나한테는 곱게 보일 연극이 아니었다. 그때의 심정은 '가부장 아버지들에게 위안만 되는 연극이기만 해봐라' 였다. 연극을 모두 본 지금 연극에 대한 오명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내 인식의 변화를 독자가 잘 좇아가길 바라며 글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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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 구현될 수 있었던 치밀한 구조

작품은 채만식이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녹화하면서 시작한다. 채만식은 자기가 '아내의 서랍'이라는 시가 작은 문화잡지에 올랐음을 소개하고, 그 시를 쓰게 된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이후로 영상편지를 찍는 현재와 과거 회상이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전개된다. 문학 작품이나 영화나 드라마처럼 시간의 제약이 없을 때 자연스러운 것을 배우들은 훌륭한 연기실력으로 그 이상으로 만들었다. 공간과 시간에 제약이 있는 연극의 한계를 넘어서 해학이나 관객의 참여로 끌어낸 것은 특별한 장치가 아니라 배우들의 역량이었다. 채만식의 배우는 러닝타임 100분 동안 장면의 전환에 맞게 자유자재로 연기한다. 바로 전 장면에서 화를 내고 울음을 터뜨렸다면 순식간에 변해서 웃고 영상편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우의 역량이 특히 잘 드러는 곳은 채만식이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빈 그릇에서 밥을 뜨고 식사를 하는 배우의 모습은 자신감과 연륜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내 유영실의 배우도 아내 역할과 딸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했는데, 딸이 어머니의 물건을 만지면서 아내로 바뀌는 순간이 아니었다면 같은 배우인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극의 절정이 치닫고 나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유영실의 연기도 큰 감명을 주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분들과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행동거지가 비슷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각공연을 즐기면서 줄거리나 의의를 살피고 배우의 연기실력을 집중적으로 보지 않는데, 이번 연극에서 배우의 연기가 극의 생동감을 어떻게 살리는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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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더 많은 부부에게 닿길 바랍니다.

연극을 보기 전 안 좋은 사건이 있어서도 있지만, 이렇게 관람 내내 부산스러운 연극도 처음이었다. 보통 공연을 보러 가면 대다수가 내 또래거나 조금 많아 보이는 관람객들이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연극 관객의 대다수는 주인공들만큼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었다. 어르신들한테는 불편하고 작은 의자 때문인지 신발을 벗고 앞 의자에 발을 올리신다거나,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큰 방해는 되지 않았지만 낯설었다. 낯선 기분도 처음에 그랬지,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나와 어르신들은 함께 집중했다. 심지어 젊은 나와 일행보다 연극에 깊게 몰입하셨는지 극의 내용에 따라 반응이 내 귀에 속속들이 박혔다. 채만식의 절규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부부가 다시 재회했을 때는 같이 온 배우자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는 그것이 정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화이트 큐브에 걸린 그림과 그럴듯한 무대에 오르는 작품에만 익숙해 잊어버린 예술의 진가를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 막이 내리고 배우들이 작품의 의도를 간략히 설명했다. 이 작품이 그 누구보다 나이 든 부부들에게 바치며 여기에 온 시간이 사랑의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선물을 준비했다는 말이었다. 극에서 채만식이 유영실에게 바친 것 처럼 케이크를 준비했는데, 앞자리에 앉은 나이 지긋한 부부가 받아갔다. 활짝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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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부장제 속 사랑이라는 대안

사실 극의 초중반까지 큰 공감을 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20대 초중반 대학생이고, 내 기준에서 가부장제는 늘 누군가를 괴롭혀왔던 것이었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나 극의 구조는 흥미로웠지만, 아내의 희생이 반복적으로 비치면서 불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은 극에서 부부의 딸이 나오는 시점부터였다. 딸은 아버지의 이기심과 무심함을 꼬집으면서 극의 후반에서는 아버지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아낸다. 채만식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이 '몹쓸 놈'임을 고백한다. 단순히 나라는 관람객의 공감을 떠나 극에서 딸의 등장은 메시지에서 큰 의미를 있다. 단순히 극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온 채만식이 아내의 희생을 깨닫고 참회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지었다면, 페미니즘이 대두되기 전의 작품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다못해 조선시대 열녀전에서도 '지고지순한 아내에게 돌아온 탕아 남편' 의 내용은 숱하게 반복되어오지 않았던가?) 여기에 딸의 시선이 극에 적극적으로 들어가면서 연극의 내용은 더욱 깊어진다. 딸의 시선은 오늘날의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행동을 '정신병리적'인 것으로 쏘아붙이는 모습이 가장 그렇다. 딸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막이 내리고 배우가 한 말을 빌려오고 싶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적응해온 아버지들,
세상의 변화로 억울한 피해자가 된 기분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나잇대 사람으로 대표해서
오늘날 여성분들에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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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위에는 국가의 역사가 있고, 국가의 역사 위에는 세계의 변화가 있다. 가부장제가 낳은 부조리는 사실 그 이전 사회가 낳은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고 바뀌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계속해서 깊은 상처를 받는다. 연극에서 채만식은 자신을 죄인이라 칭하고 알츠하이머로 고통받는 아내를 위해 깊게 헌신한다. 그는 다소 무심하고 이야기를 듣지 않은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아버지였을 뿐이다. 아내나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엄격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채만식의 인생을 죄스럽다고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채만식은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사회는 바꿀 수 없지만 작은 관계는 바뀔 수 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굳은 콘크리트도 조금씩 녹여낼 수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고, 가끔 화도 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건 아빠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보고 나서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고 있었는데 살짝 꺼내봐야겠다. 물론 내가 섭섭했던 이유도 잘 붙여서 말이다. 아빠의 세상은 바뀌지 않을 수 있지만, 나와의 관계는 그래도 사랑으로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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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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