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여성 화가'보단 '화가'인 '여성'이었던 그- 마리 로랑생전

글 입력 2017.12.10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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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로랑생포스터-02.jpg
 

“피카소를 그린 화가, 샤넬을 그린 여성”

전시 설명의 첫 문구를 보면서 의아함이 들었다. 그 누구도 반 고흐를 표현하면서 ‘밤하늘을 그린 화가, 자연을 그린 남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 고흐가 ‘남성’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설명하는데 그가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마리 로랑생에겐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를 소개하는 첫 문구부터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누군가에겐, 혹은 꽤 많은 사람들에겐 마리 로랑생을 설명하는데 ‘여성’이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왜 고흐를 설명하는 데는 크게 필요치 않았던 성별이 로랑생에게는 중요했을까.

역사적으로 화단에는 여성이 별로 없었다. 아니, 문단에도 여성은 별로 없었다. 아니, 사실 사회적으로 여성의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인간의 기본값은 ‘남성’이었고 그렇기에 여성은 항상 ‘여성’이라는 수식어로 설명돼왔다. 그가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이점을 갖고있다고 치부됐던 것이다. 그리고 이 특이점은 늘 그를 설명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 되곤 했다. 애초에 명명부터 ‘여성 **’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여성 **’라는 호칭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불편하다고 여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마리 로랑생은 내 눈길을 끌 수 밖에 없었다.


33세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jpg


“보이는 것은 권력이다.”

그 이유를 나는 어느 강연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말로 설명하고자 한다. 보이는 것은 권력이다. 이 말인즉, 어딘가에 많이 드러나고 보여진다는 사실 자체가 권력을 방증하고 또 권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남성 중심 사회에선 남성만이 드러나고 남성만이 보인다. 충무로에 소위 ‘알탕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만 넘쳐나고 있는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양산하는 자’는 권력이 있는 이들이고 그들이 그려내는 건 그들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탕 영화’가 넘쳐나는 가운데 여성과 성소수자들, 그리고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은 지워졌다. 여기서 문제는 지워진 이들, 즉 보이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알 수 없고, 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이해할 수도 없다. 그저 어느 저편에 타자화 된 채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보인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고, 또 ‘많이 보일수록’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jpg
 

이런 구조 속에서 여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이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여성을 모델로 한 수많은 그림들이 있지만, 그 그림들의 대다수는 남성적 시각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르네상스 이후 여성 누드가 우위를 점해갔던 이유가 남성의 관음을 위해서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남성적인 시각에서 그려진 여성이란 존재가 과연 얼마큼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더더욱 실제 여성들의 삶과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의 존재가 절실한 것이다.

내겐 마리 로랑생이 바로 그런 존재로 다가왔다. 남성이 주를 이룬 시대에서 꿋꿋하게 그림을 그려나갔던 여성. 남성 위주 시각만이 가득하던 세계에 여성의 시각을 보여준 이. 여성의 삶을 그려낸 이. 마리 로랑생의 그림에선 여성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어도 전혀 관음적이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여성들의 모습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의 그림 속 여성들은 누군가에게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로서 존재했다. 내게 ‘여성’ 마리 로랑생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리 로랑생은 ‘여성’인 화가라기보단, ‘화가’인 여성이었다. 화가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냈던 그를.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보이는 그의 그림들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전시에서 마주하게 될 그가, 그의 그림 속에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여성들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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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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