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문화 전반]

'김생민의 영수증'을 보다가
글 입력 2017.12.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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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할머니의 야무진 꿈"

  '호호 할머니가 되어 볕 좋은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삶'은 내 노후의 최종 목표다. 누군가 장래희망을 물을 때면 원하는 직업을 말한 후, 사실 제일 큰 꿈은 따로 있다며 저 말을 덧붙여온 지도 10년째다. 예전엔 너무 소소하다고 나무라던 친구들이 취업을 하고부터는 꿈도 야무지다고 핀잔을 준다. 할머니의 편안한 일상은 두둑한 노후자금이 받쳐줘야 가능한 사치라는 걸 깨달은 게다. 난 그동안 알고 말한 건데... 꿈은 크게 가지라며, 얘들아.

  이렇게 노후도 막막한데, 결혼은 어찌하고 육아는 또 어찌할지 까마득하다. 아직 덜 차오른 나이에 당장 고민할 일이 아니라며 밀어두다가도, 어디선가 요즘 육아의 현실을 듣고 나면 한숨이 포옥 나온다. 본인 하나도 감당하기 벅찬 세상에 내 미니미를 낳아 번듯한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요즘 딩크도 많다니 애를 안 낳아도 되고, 아니면 독신으로 아예 혼자 살아버려야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가도 고민은 다시 도돌이표가 된다. 아직 아예 안 낳는 선택지까지는 내키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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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KBS)



"사교육이 부모의 욕심이라고? 스튜핏!"

  그러던 차에 <김생민의 영수증>을 봤다. 월 400만 원 버는 프로그래머 남편의 한 달 용돈이 5만 원, 아내는 본인 생일 선물로 만 구천 원짜리 구두를 사고, 미용실은 1년에 딱 한 번 5만 원짜리 파마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런데도 마이너스 통장이 700만 원에 육박한다. 육아휴직만 3년째라는 아내와 프로그래머 남편이 이렇게 숨통을 조이며 사는 이유는 세 명의 아이 때문이었다. 큰 아이가 지금 사교육을 4개 하고 있는데, 앞으로 다른 아이들까지 합세하면 더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것이라고. 텍스트로만 보면 자녀 교육에 혈안이 되어 노후를 갈아 넣는 부모와, 사교육에 착취당하는 아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요즘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9살인 큰 아이가 한다는 사교육은 영어, 태권도, 피아노, 바이올린이다. 그중 방과 후 활동에 포함된 저렴한 과목이 있어서 4가지가 총 40만 원 내외로 든다고 한다. 공부에 혈안이 되었다기엔 지극히 예체능에 치중되어 있고 막상 과하다 싶은 수준은 아니다. 영어, 수학은 사교육을 따로 안 하면 아이가 도태될 정도로 학교 교과 과정이 뒷받침되지 못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초등학생 4년 차 사촌 조카님에 따르면, 학교 공부에서 뒤처지는 아이들은 자신감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처지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원을 안 다니는 아이들이라고. 이런 얘기를 듣고 부모가 어찌 방치할 수 있겠는가.

  또 예체능. 피아노는 워낙 클래식한 사교육이니 필수지만, 바이올린은 사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이올린은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이나 배우는 줄 알았던 예전과 다르게 꽤 흔해진 지 오래다. 실제로 평범한 형편의 이웃집 아이도 오후마다 바이올린을 낑깡 거린지 2년이 넘었다. 비록 재능은 전혀 없지만 꽤 열심이라 실력이 아주 천천히 눈곱 만큼씩 늘고 있는데, 그 집 부모도 아이가 재미있어 해서 끊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TV와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세상이 넓은 요즘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먼저 조른다. 엄마, 철수가 합기도 배운다고 자랑해. 나도 하고 싶어. 꼬물거리며 옷섶을 붙잡는 그 어린 눈망울에 단호하기 쉽지 않다. 생각해보면 내 또래도 그런 식으로 피아노와 태권도를 시작했다. 아이가 재미없다고 금방 그만두면 모를까, 학원을 끊어주면 신나게 즐기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치맛바람으로 매도하지 말아줄래요"


  요즘은 친구를 사귀는 공간이 학원이다. 예전처럼 놀이터나 아파트 단지에 나가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놀고 있는 풍경이 드물다. 사교육의 단절은 곧 친구관계의 단절을 뜻하기도 한다. 일주일에 보통 두 번 남짓 가는 학원에서 친구들을 사귀는데, 많은 학원을 다닐수록 친구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아이가 학원을 5, 6개씩 다닌다고 다 부모 욕심이라고, 치맛바람 독하다는 식으로 매도하기에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모든 부모가 아이를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학원을 보내는 게 아니다. 복잡다난하게 얽혀있지만, 맞벌이를 하며 늦게까지 아이를 맡길 공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아이에게 또래 친구가 필요할 수도 있고, 아이가 단순히 하고 싶어 해서 보낼 수도 있다. 1등은 바라지 않더라도 멍청하다고 무시 안 받도록, 기본은 가길 바라며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다양한 활동을 하며 아이의 소질을 찾고 싶은 이유도 크다.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회사원이나 공무원이라고 답하던 우리 때의 답습은 이제 벗을 때도 됐다. 아등바등 공부해서 결국 회사원이 되었지만 노력에 상응하는 삶의 질을 보장받았냐 하면 대부분 아니었지 않나. 막연히 공부를 시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이전 부모 세대와 달리 그렇게 해봤자 삶이 더 행복하지도 않고, 허탈하기만 하다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겪어서 안다. 때문에 내 아이만큼은 최대한 다방면으로 소질을 계발해서, 훨씬 넓은 선택지에서 꿈을 고르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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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Pixabay)



"문제는 '우리'가 아니다."

  아니, 그래도 형편껏 해야지 황새 따라 하다가는 뱁새 가랑이 찢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 많은 것이 필수가 되어버렸다. 부모의 욕심이 아니라 최대한 줄이고 줄여도 허덕이게 만드는 물가 상승 대비 극히 낮은 임금 상승률이 문제다. 또, 공교육의 미흡함이 문제다.

  유럽의 선진국가들은 이런 과외교육 시스템이 아주 잘 갖춰진 좋은 사례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축구, 승마, 수영, 폴로, 테니스 등 다양한 운동을 초중고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클럽 활동으로 배운다. 바이올린, 첼로, 드럼, 피아노, 플루트 등의 악기들은 물론이고, 미술도 우리나라로 치면 방과 후 활동으로 지원받으며 다양하게 배우고 누린다. 부모의 사교육 부담이 극히 줄어드는 한편, 가정형편에 관계없이 관심사나 소질에 따라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초등학생 고학년만 되어도 방과 후 활동 지원이 끊기는 우리나라와 달리, 대학까지 이런 활동이 보장되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직업의 선택지는 물론이고 취미의 폭도 넓다.

  유럽에서는 흔히 말하는 국영수 같은 기본 교과과목도 점수와 등수에 치중되어 있는게 아니라, 아이가 개념을 정말로 이해했는지에 집중한다. 초등학생들을 붙잡고 선행학습에 열을 올리며 문제 푸는 '스킬'을 가르쳐 주고 있는 학원들이 정말 원흉일까, 아니면 쓸데없이 높은 수준의 문제를 내고 서열을 매기는 공교육이 원인일까. 단순히 현재의 선생님들만을 욕하기 어려운, 아주 오래전부터 고착화된 거시적인 문제다.

  독일 친구가 본인은 모국에서 제공받은 교육에 굉장히 만족하며 자라서, 아이를 낳는다면 꼭 독일에서 키울 거라는 말에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반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 때문에 이민을 고려하지 않는가. 괜히 헛바람이 들어 '독일 이민'을 검색했다가 세상에 만만한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만두었지만, 부러움은 여전하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닌데"


  영수증에 나온 집은 사실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다. 마이너스통장이 700만 원이 넘지만 수도권에 자가를 대출 없이 보유 중이다. 프로그래머 남편의 연봉도 별일 없는 한 차곡차곡 오를 것이고, 육아휴직만 3년째라는 걸 보면 안정적인 게 분명한 직장에 아내도 곧 복직할 것이다. 빠듯하긴 하지만 앞으로 트일 숨통이 있는 집이었다.

  문제는 나다. 서울 한편에 아파트 자가는 커녕 전세만 얻으려 해도 벌써 대출이 생길 테다. 오늘 언급한 사교육은 육아의 극히 일부분일 뿐 더 많은 감정적, 경제적 고난에 치이겠지. 아이 계획은 고사하고 그전에 결혼 자금, 아니 노후 자금은 모을 수 있을는지.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하던 순수한 대학생은 어디 갔을까. 왜 아무도 이런 현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걸까. 한 외국계 회사의 임원이 14년 전 신입 초봉과 지금 신입들 초봉이 딱 200만 원 차이 난다고 고백한 게 기억난다. 6살 때 소꿉친구와 아들이 좋네, 딸이 좋네 벌이던 설전이 다 부질없어진다. 예전엔 소박했던 꿈이 이젠 너무 거대해져만 간다. 과연 내가 이 땅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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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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