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채색 속 희망의 향연, '마리로랑생展'

글 입력 2017.12.29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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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로랑생 展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017-11-29 12;03;04.jpg
 Kiss
 1927 / 캔버스에 유채 / 81.2x65.1
Musee Marie Laurencin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다.
마음의 여유가 줄어든 것이 꼭 날씨 탓인 마냥
12월 한달도 바쁜 틈에 치여 훌쩍 떠나 보내게 되었다.

2017년이 다 가기 전,
그 마무리를 매듭지으며
나의 마음 한 켠을 촉촉이 적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마리 로랑생展'

일전에 프리뷰를 통해 본
마리로랑생의 작품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여성화가만의
색깔을 담고 있었으며,
그리 날카롭지 않은 부드러운 붓질 속에
특유의 여성성이 녹아있었다.

전시 공간 역시
그녀 작품의 메인 컬러인 분홍빛이 펼쳐져
흡사 그녀의 내밀한 방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stage_02.jpg
 

전시실에 들어서자 그녀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 액자가 여러 점 걸려있었다. 70세가 다 되도록 캔버스와 붓을 놓지 않았던 그녀를 사진에 담긴 모습으로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한결같은 화풍처럼 당당하고 굳은 아우라가 있었다. 나의 첫 인상처럼, 그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정형화된 여성상을 거부하고, 화가이자 문학가로서 자신의 길을 당당히 견지한 독립적인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시는 그녀 생애의 굵직한 선을 따라 전개된다. 마리 로랑생의 젊은 시절, 그녀가 가장 아리따웠던 시기에 그린 자화상, 초상화가 두드러진다. 특히나 아래의 자화상이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았는데, 가느다란 손가락과 아름다운 목덜미를 가진 가녀린 여성을 그린 작품들과 달리 조금 더 온도가 느껴지는 색조의 그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생기 있는 얼굴과 고혹적인 분위기를 가진 여인의 모습은 실제 그녀의 모습에 가까운, 안정적이고 당당한 풍채를 가졌다.


크기변환_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ee Marie Laurencin.jpg
자화상
 1905 / 목판에유채 / 40x30
Musee Marie Laurencin
 


나는 아주 슬펐습니다.
그래서인지 검은색과 흰색이
주조를 이룬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분홍색과 푸른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에는 두 번의 굴곡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와의 실연이요, 다른 하나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망명생활이었다.

운명처럼 만난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멀어지고, 곧이어 결혼한 독일인 남편과의 생활도 망명생활로 얼룩지며 조국과 사랑, 가족을 동시에 상실하는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시기의 탓인지 망명시기를 거친 작품들에는 무채색의 음울함이 짙게 깔려있다. 얼굴에 반 이상 드리운 그늘과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 탁한 눈동자 또한 이전과 대비되는 그녀의 여인상이다. 회색조가 만연한 가운데 간간히 보이는 분홍과 초록, 노랑의 조화는 이러한 답답함 속에서도 따뜻함의 여지를 남겨둔다.

 
크기변환_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1913, 캔버스에 유채, 112x144, Musee Marie Laurencin.jpg
우아한 무도회 또는 시골에서의 춤
 1913 / 캔버스에 유채 / 112x144
Musee Marie Laurencin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꽃피운다. 무채색 계열의 바탕색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녀가 즐겨 사용하던 분홍과 파랑, 노랑은 그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해 한껏 따뜻해진 색감이다. 인물들 또한 다소 가녀리고 불안해보이던 형태에서 벗어나, 윤곽선은 더욱 흐려졌지만 더욱 안정되고 생기가 도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그녀는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 고립으로 정형화된 작품을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찾아온 전쟁의 위기감과 공포에 하얗게 질린 것 마냥, 말년의 그림은 더욱 강렬한 원색의 색감을 여실 없이 드러낸다. 강렬한 색채는 절망의 시기를 따뜻함의 색으로 감싸고자 한 그녀만의 사랑과, 전쟁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기 위한 그녀 자신의 몸부림과 같은 확실한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기변환_세명의 젊은 여인들, 1953년경, 캔버스에 유채,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jpg
세 명의 젊은 여인들
 1953 / 캔버스에 유채 / 97.3x131
Musee Marie Laurencin 
   

이번 전시에서는 그녀의 유화작품 외에도, 다양한 협업 작업들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큰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스케치와 공연 실황을 볼 수 있으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랑의 시도' 등 유명 문학 작품의 삽화로 들어간 그녀의 아기자기한 드로잉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녀의 화려한 색감과 펜촉이 잘 드러난 알렉상드르 뒤마 '춘희'의 일러스트 작품들이었다. 소품에서조차 당시 프랑스 여성들의 트렌디한 드레스 복장을 선명한 색감과 선으로 잘 살려낸 우아하고 고아한 여성성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전시의 끝에는 시인으로서의 마리 로랑생이 발간한 시집 '밤의 수첩' 속 시, '잊혀진 여인(진정제)'과, 연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를 직접 필사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로랑생의 그림들을 둘러본 뒤에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니 그녀에 대한 기억이 하나로 정리되는 듯했다.


크기변환_stage_14.jpg
 

잊히기엔 너무나 두려웠던 여인, 그녀의 삶만큼이나 강렬하고 따사로운 색채가 뇌리에 깊이 박힌 전시였다. 마리로랑생의 그림을 가슴에 품으며, 이번 겨울 또한 따스히 보낼 수 있길 바란다.




상세1124-01.jpg
 

[심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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