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백석, 우화(羽化)하다

연극 '백석우화' 리뷰
글 입력 2018.01.0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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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의 마지막 날, 백석을 만나러 갔다. 백석을 만나러 간다고는 했지만 사실 <백석우화> 프리뷰를 쓴 다음부터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백석과 <백석우화> 포스터 속 광대 분장을 한 백석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그게 이 연극을 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나는 몇몇의 빈약한 이미지로 존재하는 백석이 아닌 짧게나마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존재했던 백석이 궁금했다. <백석우화>에서 '우화' 는 물론 '이솝우화'할 때의 그 '寓話' 이지만 연극을 보는 100분은 내 안의 백석이 그 빈약한 이미지로부터 탈피해 우화(羽化) 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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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은 잘 알려진 대로 시인이므로, 그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누구나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든 도서관을 직접 찾아가든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읽느냐다.

 <백석우화>는 11장으로 이루어진 서사적 기록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은 백석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의 삶을 차분하게 조명한다. 백석의 특정 시기나 그에게 일어났던 특정 사건만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기에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극 사이사이를 메꾸는 게 백석의 작품이다. 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시부터 북한에서 창작되어 잘 알려지지 않은 동화시와 에세이까지. 그의 혼이 깃든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관객에게 선보인다. 판소리, 정가, 발라드처럼 음악이 되는가 하면 인물이 내뱉는 대사 자체가 되기도 한다. 때론 배우들이 해설자가 되어 관객이 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종이 위에서 납작한 활자로만 존재하던 시는 어느덧 무대에 가득 차올라 백석의 삶 속 장면 장면을 파고든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백석이 지인들에게 연인 자야를 처음 소개하는 순간에,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은 그가 만주에서 홀로 외로이 지내던 때에 삽입되는 식이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함께 살아난 시의 생명력은 활자에 머물러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덕분에 훨씬 입체적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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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썼던 시만큼이나 백석은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천상 예술가였지만 세상은 예술가로만 살아가기는 힘든 곳이었다. 시인 '백석'의 삶과 인간 '백기행(백석의 본명)'의 삶이 한 사람의 앞에 놓여 있었다.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라고 볼 수도 없다. 백석이 북에서 보냈던 날들은 둘 사이의 갈등처럼 보였다. 북한 체제가 원하는 대로 글을 쓰며 가족과 평양에서 안락한 삶을 사는 쪽과 핍박받을지언정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쪽 사이에서 백석과 백기행은 괴로워했다. 중간에 그는 평양의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붓을 총,창으로!' 와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쪽도 완전히 버리지 못해 헤매던 그가 연극 중후반부에 이르러 광대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서 마지막으로 쓴 글을 읽을 때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원우: 이런 글을 왜 쓰시오?

백 석 :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더 이상 쓸 게 없다 말하는, 진이 다 빠진 그 목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그 시대 모든 개인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지만 그중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특히나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남에서는 북으로 넘어갔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체제에 맞지 않는 창작을 한다는 이유로 모두에게서 잊힌 백석은 가족과 함께 삼수갑산에 들어간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라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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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2: 그때 저희 아버지를 따라
남으로 내려갔어야 했습니다

백석: 그렇지 않아 내레 어딜가나
불편한 존재인데 뭐
나는 그냥 이렇게 세상 끄트머리에
가만히 있는 게 좋아
이렇게 살아있는 게 축복이지 뭐


 마지막 장에는 삼수갑산에 들어가 30년을 산 백석의 모습이 나온다. 백석은 그 세월 동안 읽는 사람이 있든 없든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다시 쓴 것을 불쏘시개로 사용해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연극에서는 그저 잠깐의 암전 후 30년이 지나갔지만 실제 30년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제목이 '백석우화(寓話)'이기 때문일까, 사진 한 번 찍자는 말에 큰 소리로 '나 살아 있어' 라고 외치고 아내에게 '나타샤'라 부르며 농을 거는 그의 모습이 마냥 비참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굴레를 벗어나 해탈한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번데기에서 우화한 나비를 보는 것처럼.

 100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다만, 나오는 길에는 <백석우화> 포스터 속 광대 분장을 하고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백석이 이전처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에게 참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내 머릿속에서 껍데기 뿐인 이미지에 갇혀 있던 백석은 이제 한결 단단하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백석도, 그의 시도 예전과는 달리 보일 것이다.





<공연 정보>

공연명: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일시: 2017.12.22(금)-2018.1.14(일)
평일 오후 8시, 주말 오후 3시

공연시간: 100분

장소: 30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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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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