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째깍째깍 초침 소린 들리건만 우린 아직 여기, < 경남 창녕군 길곡면 > [연극]

글 입력 2018.01.12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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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아직 여기


‘신년’ 이란 단어는 부지런한 사람을 만든다. 그게 며칠, 아니 심지어 몇 시간이 안 간다 해도, ‘새롭게 맞이할 한 해는 어떻게 보내고 싶다.’라는 작은 소망은 아주 잠깐 우리에게 활력을 선물한다. 방 청소를 하고, 덮어두었던 책을 읽고, 방 안을 뒹굴뒹굴하다가도 벌떡 일어나 다이어리를 정리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고작 24시간 안 짝의 차이인데도, 새해엔 좀 더 유의미하고 보람찬 생애를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 아주 거창하진 않더라도, 삶의 조건이 조금은 나아지길, 내 생애가 조금은 행복해지길 그렇게 소원한다.
 
그러나 삶이 변하지도 않고 변하기도 어렵다고 선고받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원해야 할까? 내가, 내 삶의 조건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려움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살기 위해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서 아등바등 뛰어야 할까.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첫선을 보인 2007년으로부터 현재 2018년까지, 11년의 간극을 지렛대 삼아, 변하지 않는 생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돈과 출산과 일상과 꿈에 대한 생의 조건은 절대적으로 소여되는 것이 아닌데도, 절대적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는 변하지도 않았고, 어쩌면 변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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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11년이란 시간은 현실을 향한 펜촉을 뭉툭하게 만들었다. 극이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통찰이 아니고, 이미 지난 몇십 년간 매스컴에서, 강연장에서, 책 속에서, 술자리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얘기다. 그런데 관객이 공감하고, 웃다가도 울며, 공포감마저 느끼는 것은 변하지 않은 11년에서 깨달은 내 생의 조건들 때문이다. 11년간,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 것처럼, 째깍째깍 초침 소린 들리건만, 우린 아직 여기,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 있다.
 

 
빙하보다 지독한 한국의 현실이란


극의 원작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 작의 <오버외스터라이히>로, 오스트리아의 변방의 ‘오버외스터라이히’는 한국의 경남 창녕군 길곡면으로 번안되었다. 극은 산재한 기호들로 한국의 전형성을 구축해낸다. 극 전체를 끌고 나가는 경상도 사투리는 특히나 효과적인데, 사투리는 번역의 느낌은 모두 지우고, 지금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이 한국이라고 끊임없이 역설한다. 유재석, 김혜수 등의 기호 역시, 한국적 일상성을 자연스럽게 주조한다.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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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인 종철과 선미에게 TV와 잡지, 메뉴판은 욕망을 중개한다. 돈키호테가 기사담을 읽고 아마디스를 모방하듯, 부부는 TV 속 유재석을 화두 삼아 해외의 리조트와 와인을 상상하고, 잡지를 보며 월풀을 희망하다가, 아스파라거스 대신 대파가 곁들여진 스테이크를 먹는다. 식당 메뉴판에 있는 ‘불붙이는 요리’를 궁금해하지만 비쌀까봐 포기한 후, 오리배를 타는 것으로 낭만을 충족한다. 부부는 중개된 욕망 안에서도 욕망을 상상에 맡기거나, 값싸고 조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택한다. ‘대학도 못 나온’ 물류 배달원과 비정규직 판매직원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좋은 것’의 대가를 치를 형편이 안 되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도 부부는 작은 행복들을 누리며 행복해한다. 서로의 상상에 면박을 주면서도 행복해하고, 결혼기념일에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인형 바구니에 와인을 담아 장식으로 삼으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말한다. 이 형편껏 누리던 행복은 아이가 찾아오면서 산산이 부서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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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기르는, 옛날 옛적부터 아주 평범한 일상의 전형이라고 여겨왔던 일은 부부에겐 사치다. 해외에 나가서 리조트를 거니는 것도 아니고, 깨끗한 물로 스파 월풀 하는 것도 아니다. 선미 배 속에 실재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데, 남들 다 하는 건데, 월 180 버는 고졸과 임신했다고 말하면 해고당할 비정규직에겐, 아이는 리조트와 월풀과 불붙이는 요리만큼이나 상상이요, 사치고 욕심이 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위해선 부부의 작은 일상조차 모두 포기해야 한다. 부부의 일상이 계산되는 시퀀스는 단연 압권이다. 차, 보험, 부모님 용돈, TV, 담배 등 부부의 일상을 작게 지탱하고 있는 것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모두 지워진다. 종철이 겨우 산 색소폰을 팔아야 하고, 선미는 미장원도 가지 않고, 값싼 화장품만 사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일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가? 심지어는 낙태 때문에 실랑이하면서도 40만 원이 들먹여지는데, 이 부부는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을까? 한국이란 배경이 명징하니 관객의 고개는 절레절레 저어질 수밖에 없다.
 
 
 
연극적 상상력의 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종철이 음주 단속에 걸려서, 아이는 둘째 치고, 당장 부부의 생계부터 깜깜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이 지독하게 현실적인 비극, 차라리 빙하시대가 도래했으면 싶은 부박한 현실에서, 극은 어색한 위로를 건네지도, 어느 것이 옳다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자아에 대해 고민하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며 미래도 불행하게 관조하는 종철과 부박한 현실마저 신뢰하고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선미. 아주 작게는 아이를 낙태시키는 게 행복할까, 빠듯하더라도 기르는 것이 행복할까. 두 인물 중 어느 편이 옳을까. 러닝타임 내내 고민하지만, 관객은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지 못한다. 불같이 쏟아지는 두 인물의 대화 속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선미가 이상을 말하면 종철이 현실로 반박해내고, 종철이 절망만을 말하면 선미가 희망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와 감정이 팽팽하게 오고 가는 이인극의 묘미는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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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스케치하듯이 현실성 있게 이어지던 극은 결말에 이르러 대단히 작위적인 어조로 마무리 짓는다. 종철이 음주 단속에 걸리고,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이 울며 암전되던 시퀀스에 이어, 엔딩 시퀀스는 밝고 희망적이고 함축적이다. 종철은 창고 일을 구하게 되었으며 면허도 3개월 후면 풀린다. 선미는 배 속의 아기에게 희망을 품으며 웃는다. 이때, 선미가 흥미롭다며 읽어주는 기사는 결말의 모호함을 수 갈래의 결말로 열어준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에서 ‘새벽’에 ‘부부의 침대에서’ ‘낙태에 찬성하지 않았던 아내를 죽인 남편’, ‘우리 형편에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충동적인 살인’, ‘저는 살인자가 아니다’. 기사의 모든 지점은 종철과 선미를 가리키고 있으나, 겉으로 보여주는 것은 희망적인 종철과 선미의 결말이다. 종철의 색소폰 연주에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가 덧입혀지며, 극은 모호함의 극치를 반어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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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촉이 둔해진 현실의 스케치로 남을 수도 있던 극은, 엔딩의 모호함으로 연극적 예술성을 확보한다. 부러 모호하고 비현실적으로 주조한 엔딩의 힘은 앞선 모든 스케치를 아우르며, 결말을 목격하거나, 또는 상상하게 만듦으로써 한국 사회의 암담함을 정통으로 느끼게 한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의 ‘살인자가 아니라’는 남자는 종철일 수도 있고, 죽은 아내는 선미일 수도 있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 신문 기사를 읽고 있는 종철과 선미의 모습이 극의 결말일 수도 있다. 종철이 창고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면? 면허정지가 3개월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종철과 선미가 살인사건의 주인공일까? 이 상상의 연쇄 고리 속에서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다. 그렇다면 종철이 살인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세상은, 선미가 피해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세상은, 째깍째깍 11년이 지났음에도 우리가 아직 머무르고 있는, 지금 여기,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 자료제공 : 극단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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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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