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미지와 이야기의 힘 [문화 전반]

글 입력 2018.01.1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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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미지와 이야기의 힘



1. 당신만의 상징을 찾길 바라면서 하는 이야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신년이 되었을 때, 나와 친구는 점쟁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우리는 늘 들어가고 나올 때 "이런 거 다 비과학적이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점쟁이를 만나러 갔다. 점쟁이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았건, 틀리건을 떠나 그들이 말해준 것들은 유난히 귀에 콕콕 박혔다. 타로카드를 본 적 있는가? 나는 아직도 대학교에 갓 올라갔을 때, 점쟁이가 내민 <은둔자> 카드를 잊지 못한다. Hermit이라는 이름의 카드는 험한 산속에서 외롭게 등불을 비추고 나아가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친구랑 함께 있던 터라, 그 자리에서 울 수는 없었는데 그 이미지가 잊히지가 않았다. 그 외로운 고독, 구원에 관한 간절한 갈망, 세상의 다른 것을 추구하기엔 강한 목표의식과 너무 늙어버린 몸이 너무 나를 닮아 있었다.

 점쟁이의 이야기는 한편으로 가볍게 넘길만한 일이지만, 당시의 나에게 다가온 이미지가 나한테는 너무 강렬했다. 모호한 이미지와 추상적인 상징은 확률에 따른 가짓수 이상이다. 그 느낌은 단순히 내 운명이 그 카드를 보게 했다거나, 불안한 삶에서 잠정적인 답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식의 성찰은 또 다른 논의를 가능하게 하겠지만, 그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에 만든 파문을 무시하게 만든다. 사실 무엇이 '시작점'이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주는 우리의 인생을 풍경화와 인간의 시기로, 타로는 오래된 상징으로 우리를 그려낸다. 굳이 내가 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이유는, 가장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이미지로 빗대기 가장 만만한 과정이 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카드가 나와도, 그 모든 상징과 이미지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나는 글을 읽는 사람이 어떤 경험으로서건 강하게 사로잡힌 '그것'을 꺼내며 내 글을 읽길 바란다.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다'라는 노랫말처럼, 우리 안에는 수만 가지 모습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닮은 것들을 밖에서 찾아내고, 사로잡힌다. 나 같은 경우에는 물고기가 그랬다. 신년을 맞는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길 바란다. 외부에서 우리는 구체적이고 제한된 모습만을 취할 수 있지만, 우리의 내면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상징과 이미지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이 글에서 내가 사로잡힌 상징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힘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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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그림자를 어항 삼아 숨 쉬던 물고기 한 마리

 어릴 때부터 나는 신비학에 관심이 많았다. 타로카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나는 오래전부터 성경과 대중과 문화에 통용되었던 이미지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 카드의 그림이 흥미로웠다. 중학생 때부터 어색하게나마 시경을 읽고 독학을 한 것은, 점술 그 자체로서보다 사람들에게 호소 되는 이미지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 관심이 이어져 그림을 통해 사람을 치료한다는 표현예술치료로 이어졌으니, 내 삶은 비교적 한 점을 향해 달려왔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이미지를 탐색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에게 이미지는 단순한 표현이 아닌 힘을 가진 것이었다. 나한테 '이미지'는 그야말로 마법의 영역에 가까웠다. 전설의 레전드, 어둠의 다크스러운 간지나는 마법이 아니라, 그것은 나의 삶에 명확한 영향력을 가졌었다. 처음 그 힘을 느끼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일기를 쓸 때였다.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지상에 던져진 물고기다. 물고기는 다른 사람과 다른 호흡기관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가미를 통해 숨 쉬는 폐를 가졌다. 여기는 바닷물 대신 맑은 공기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없다. 살아갈 수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내가 물고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3학년때 심각한 따돌림을 당하고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세상은 숨 쉴 수 없는 곳이었다. 이 세상이 생존할 수 없는 곳인 게 아니라, 내가 타고난 호흡기관이 달라서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나는 지상에 던져진 물고기 같았다. 나 자신을 스스로 물고기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힘을 느끼게 했다. 내 삶이 좀 더 작품에 가까워진다고 해야 할까, 더 특별해진다고 해야 할까.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말을 되뇌고 되뇔수록, 내가 사는 세계가 왜 육지여야 했고, 내가 꿈꾸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늘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늘 내 삶에 눈물 자국보다 더 뚜렷한 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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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물고기는 커지면서 내 세계를 확장했다.

 우리 안에서 메아리치는 이미지와 이야기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나는 매번 내가 물고기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늘 '지상에 던져진 물고기'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때로 멈춰 서서 내가 '어떤 물고기'인지를 생각한다. 내 삶은 물고기라는 상징이 변화해오는 과정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내가 떠올린 물고기의 모습이 변화할 때마다, 현실의 나 자신도 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고기라는 상징은 수많은 갈래로 펼쳐져, 바닷속 무한한 자유나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간혹 긴 꼬리를 가진 그 물고기를 생각해낸다. 육상에 던져진 물고기는 비참하지만, 한편으로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그 모습은 무한한 활기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육상에 던져진 물고기는 지상을 헤엄치고, 바다를 꿈꾼다. 어쩌면 그는 이제 다리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도 물고기에 꽂혀있다. 나는 정신분석상담을 오래 받았는데, 내가 물고기와 바다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후에 했던 짧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선생님은 내가 꿈꾸는 바다가 수많은 미지와 생명이 잠든 거대한 세계라고 말씀하셨다. 그 설명이 내 세계를 한번 뒤흔들어 놨다. 그리고 그 말은 아직도 남아 정말 내가 꿈꾸는 세계가 되었다. 나는 바다를 꿈꾼다. 물론 현실 속에서 그것은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나는 인간 세계의 바다같은 면을 사랑하고, 그 안을 헤엄치길 바란다.



4. 그 찰나의 깨달음, 감동

 초등학생 때 순간 떠올린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점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이런 현상에 관해서는 융이 한 말에 크게 공감한다. 구스타프 칼 융은 인간이 의식-무의식의 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어떤 무엇엔가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무엇엔가 사로잡히는 현상은 정신 에너지가 역동적으로 작용해서 생긴 전형적인 관계로, 그것은 어떤 안정적이고 자율적인 체계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내가 갑자기 물고기를 떠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보이지만, 내 무의식과 의식이 엮여 만들어진 내 진정한 모습 중 하나였다. 똑같은 모습은 내 자아를 사로잡았고, 그것이 내 삶을 가리키는 하나의 굵직한 상징이 되었다. 어쩌면 나라는 개인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이런 과정은 수백 번 반복되었을지도 모른다. 라스코 벽화에 그려진 황소와 누워있는 남자를 볼 때마다, 사자의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예술인을 볼 때마다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의 역사라는 생각을 한다. 이미지는 우리를 작품으로 만든다. 한 사람이 꿈꾸는 삶과 이미지는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예술이 그 증거고, 예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을 고려해볼때, 어쩌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예술성자체가 마법일지도 모른다.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건 좋은 갤러리를 방문하고 싶은 관람객의 마음과 같다. 하지만 내 글로 인해 당신이 떠올린 이미지가 대중적인 설명으로 읽히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다와 물고기를 일반적인 설명으로 풀어낸 것처럼 일견 기호학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경험을 요약하고 정리하다 보니 의미가 축소되는 점은 글을 쓰는 나로서도 아쉬운 점이다.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 내가 그려낸 바다와 물고기는 인류가 반복해온 모습과 비슷하지만, 개인적이기도 하다. 개인의 상징은 단순히 기호학적인 수준에서는 해석될 수 없다. 과거의 심리학자들은 꿈이나 자유연상을 통해 떠오른 이미지에 모두 연결되는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에서 나타나는 상징을 성적인 원인으로 해석했는데, 이런 식으로 어떤 상징을 어떤 의미에 머무르게 하는 기호학적 해석은 그 상징이 가진 수많은 역동성을 제한시킨다. 그렇게 될 때 상징은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인습적인 관계 안에서 통용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당신만의 상징을 그려내고, 그 상징을 발달시켜 나갔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을 볼 때마다, 사회생활을 할 때마다, 늘 나를 깎아내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제도를 헐뜯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 있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 어떤 세계에서도 반복되지 않을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누구보다 스스로가 그것을 가장 소중하게 바라봐줘야 한다. 문득 글을 멈추고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그린 그 스케치는 무엇인가가 궁금하다. 세상은 크고, 우주에 뜬 별처럼 우리는 너무 많고 너무 밝다. 우리는 서로의 그림을 하나하나를 들여다볼 수 없지만, 당신은 소중한 누군가에게 그것을 조금씩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유대감을 느낀다. 색채를 더하고, 더 이야기를 추가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그림을 완성한다. 고루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노래처럼 지루하게 선명하기보다는 흐릿해도 흥미롭게, 우리는 다른 곳에서 같이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나는 신년에도 펜을 꽉 쥐어잡은 그 손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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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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